전체 글 554

김유원, 불펜의 시간

이런 강연은 기현이 즐겨 찾는 피로회복제였다. 교수가 여기 온 청년들이 희망이라고 얘기해주면 한 달 정도는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교수는 모두가 기대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피로회복제의 엑기스를 넘겨주지 않았다. "글쎄요. 저도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회학자는 현실을 보고 분석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발 늦죠. 희망의 실마리라는게 있다면 아마 저보다는 여러분들 가까이에 있을 겁니다." 강연을 들으러 왔다고 해서 당신들이 희망일 순 없다. 당신들이 기대하는 안이한 대답은 하지 않겠다는 거절이었다. 말의 내용은 완곡했으나 말투는 단호했다. 강연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기현은 강연뽕을 채쥠 소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 교수가 적어도 피로회복제를 파는 장사치는 ..

2021.09.06

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신체적 위생에 대한 배려는 물론 이 도시개발계획의 일면에 지나지 않았다. 도덕적 위생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핵심은 출생률과 가족적 가치를 장려하여 노동자들의 잦은 술집 출입과 그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알코올 중독을 근절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고려 또한 없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사회주의와 노동조합의 프로파간다가 가족 바깥, 즉 노동자들의 사교 장소에서 번성하게 될까봐 두려워했는데, 이러한 계획이 이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1930년대에 부르주아지는 이와 동일한 수단으로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부르주아 박애주의자들이 빈민을 위해 구상했던 가족복지 방식은 노동자들이 가정에 매이면 정치적 저항과 결사, 행동의 유혹으로부터 방향을 돌리게 될 것으로 예..

2021.09.06

잉그리트 폰 욀하펜,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히틀러 시대의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에 대한 책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쓰면서 나는 나치 철학의 끔찍한 본질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터무니없는'이나 '기괴한'같은 단어를 끌어다 쓰기는 쉽다. 하지만 그런 상투적 표현ㅇㅡㄹ 넘어 그 끔찍함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말로는 그 끔찍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히틀러의 제국에서 자란 나는 나치의 인종에 대한 집착이 세계대전과 절멸수용소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역사를 피해갈 수는 없다. 내 과거는 힘러의 친위대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인종에 대한 그들의 일그러진 집착 어딘가에 레벤스보른에 대한 진실과 내 태생을 알려줄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125 ㅇㅣ런 부역의 유산은 오래도록 씁쓸하게 남았다. 독일 곳곳의 ..

2021.08.23

다카노 히데유키, 수수께끼의 독립국가 소말릴란드

100미터 정도 걸었는데, 10명이 말을 걸어왔다. 그중에는 거지도 많았다. 남녀노소, 지체장애인 할 것 없이 모두 손을 내밀거나 소매를 잡아당기며 한 푼 달라고 구걸했다. 다행히 그곳 거지들도 '초고속'이어서 고개를 저으면 바로 가버린다. 세계에서 포기가 가장 빠른 거지였다. 하지만 그곳 거지들은 소말리인이 아니다. 와이얍은 "거지들 대부분은 에티오피아인이다. 소말리인들은 구걸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정도로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있다 하더라도 구걸하지 않고 차라리 남의 것을 훔치고 만다"고 했다. 구걸하느니 차라리 훔친다는 말은 소말리인들의 자존심과 기상을 강조한 것이다. 45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 안에 더 확실한 그룹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2021.08.19

코바야시 타끼지, 게 가공선

일하지 않고 돈 버는 사람 있어. 프롤레타리아. 언제나, 이거. (목 졸리는 시늉.) - 이거, 안돼! 프롤레타리아. 여러분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 백명, 천명, 오만명, 십만명 모두, 모두, 이거. (아이들이 손과 손을 맞잡는 시늉을 해 보인다.) 강해진다. 괜찮아. (어깨를 두드리고.) 안 진다. 누구에게도. 알아? 응 , 응! 일 안하는 사람, 도망가. (쏜살같이 도망치는 시늉.) 괜찮아, 정말로. 일하는 사람, 프롤레타리아, 뽐낸다. (당당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 가장 훌륭해. - 프롤레타리아 없어. 모두, 빵, 없어. 모두 죽는다. - 알아?" 게다가, 그것을 교묘하게 국가적 부의 원천 개발이라는 식으로 결부시켜, 감쪽같이 합리화했다. 빈틈이 없었다. '국가'를..

2021.08.19

김멜라, 적어도 두 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그 유명한 이태원이야. 이태원에 가면 꼭 들른다는 남산이라고. 이태원에 가는 사람들은 밤새 술 마시고 놀다 다음 날 아침이면 다 같이 도서관에 가. 그게 코스야. 너 도서관 회원 카드봤어?" 미스터 X는 서울 시내 도서관 어디에서나 통하는 회원 카드를 보여주었다. 미스터X의 말에 따르면 이태원에 가면 IS가 모이는 아지트가 있는데 그들은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만나 밤새 이야기를 나눈 후 아침이 되면 남산으로 산책을 간다고 했다. 25 이 여정은 문화적 전유와 수행을 향한 것이다. 김완선의 노래를 '호르몬'으로 해석하면서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한 노래"를 이어 부르러 가는 길. 이는 일상의 곳곳에서 유쾌한 퀴어적 정동을 찾아내고야 마는 문화적 수행의 감각과 그 역사적 계보로 이어..

2021.08.19

네 눈동자 안의 지옥, 캐서린 조

와 읽다가 자는게 아까워가지고 거의 날밤샜음,, 근데 이거 완전 K-장녀의 K-시월드 체험기 아닌가? 다음 세대에는 지금처럼 불행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내가 문학과 이야기의 매력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숫자로, 확실한 것으로 관심을 돌리기를 바랐지만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수준이 너무 높은 그리스신하와 여러 고전문학을 읽으며 성장했다. 아버지는 명확한 사고를 하고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을 원했다. 우리가 현대사회가 주는 혜택을 멀리하고 세상과 떨어져서 본인이 정한 규칙 외에는 어떠한 규칙도 따르지 않도록 양육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나 대중문화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배웠다. 아버지의 관점에서는 모두 쓸모없는 ..

2021.08.12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외로움, 불안, 희망, 군더더기 없는 인물들, 인물들 간의 상호 작용. 오히려 이 소설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존재는 af인 클라라. "아마 없을 거야. 너 같은 에이에프는 당연히 없고. 그러니까 아이가 속상하고 슬픈 듯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유 리창 밖에서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마음 쓰지 마. 이것만 알아 둬. 그런 아이는 불만에 차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런 아이는, 에이에프가 없으니 틀림없이 외로울 거예요." "그래, 그것도 맞아." 매니저가 조용히 말했다. "외롭겠지, 그래." 23 "내 말 잘 들어 봐. 아이들은 툭하면 약속을 해. 창가로 와서 온갖 약속을 다 하지. 다시 오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해. 그런 일이 수시로 일어나. 그런데 그래 놓고 다시..

2021.08.12

210806 비연애가 대세가 될 것이다

가끔 내가 동성애 안한다고 저렇게 살면 안된다고 연애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있는데... 그냥 자기 연애나 잘 했으면 좋겠다 당신이 연애가 좋은 것처럼 나는 연애를 안하는 상태가 좋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인간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를 한 사람에게 다 받으려고 하는 그 상태가 건강해보이진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가사노동, 정서적 지지, 경제적 지원 이런것을 가족제도에서 사적으로 해결하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룰을 가장 강하게 비판한 것이 여성주의자들이었는데 그걸 동성간의 관계에서 해결함으로써 모범이 되고 하는게 일련의 모순이다. * 잘 웃는 사람이면 그 사람에 대해 무례한 말을 해도 괜찮은가보다 하는 경우가 있는데..그러면 안됨

--- 2021.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