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원, 불펜의 시간

stri.destride 2021. 9. 6. 23:40

 

 

이런 강연은 기현이 즐겨 찾는 피로회복제였다. 교수가 여기 온 청년들이 희망이라고 얘기해주면 한 달 정도는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교수는 모두가 기대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피로회복제의 엑기스를 넘겨주지 않았다.

"글쎄요. 저도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회학자는 현실을 보고 분석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발 늦죠. 희망의 실마리라는게 있다면 아마 저보다는 여러분들 가까이에 있을 겁니다."

강연을 들으러 왔다고 해서 당신들이 희망일 순 없다. 당신들이 기대하는 안이한 대답은 하지 않겠다는 거절이었다. 말의 내용은 완곡했으나 말투는 단호했다. 강연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기현은 강연뽕을 채쥠 소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 교수가 적어도 피로회복제를 파는 장사치는 아니란 생각이 들어 책을 사서 제대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108

 

"(..)상사들은 자주 이중적으로 말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는 건 부하 직원들의 몫이죠. 근데 생각보다 간단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옳고 그름보다는 성과가 나는 방향으로, 그 말을 한 상사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면 돼요. 그래도 모르겠으면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고요. 그럴 땐 말귀를 잘 못알아듣는다는 평가는 각오해야겠죠."

'여직원'인 경선 선배가 지점장의 말을 해석해주었다.

준삼은 지점장의 한마디에 그렇게 많은 읨가 담겨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걸 단박에 파악한 경선 선배의 통찰에 놀랐다. 그리고 물어싿. "어떻게 해야 그런 이중적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어요?"

"상대가 뭘 원하는지 눈치를 좀 봐요. 대부분은 얼굴에 쓰여 있어요. 아까 그 할아버지 일도 준삼 씨가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수도 있어요. 물론 준삼 씨가 죄송할 일은 아니었죠. 하지만 고객이 그걸 원했잖아요. 그냥 원하는 걸 주는 거예요. 돈이 아니고 말이잖아요. 준삼 씨가 조금만 더 그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거예요."

(..)

"선배도 이중적으로 말해본 적 있으세요?"

"난 여자고 모범생이었어요. 상대를 배려하는 게 미덕이라고 배우며 자랐죠. 상대가 내 의중을 파악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도록 하는게 진정한 배려란 생각을 한 후로는 난 내 의사를 가능한 한 정확히 설명하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때로는 지나치게 친절하죠. 지금처럼요. 하지만 내 성격이 어떻든 내가 회사에서 이중적으로 말할 기회는 별로 없어요. 고졸이잖아요. 난 언제나 해석하는 쪽이죠." 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