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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위너, 언캐니 밸리

그러나 그들의 유토피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친구들 말로는 그곳이 언제부턴가 후기 자본주의가 판치는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집값이 말도 안 되게 치솟았다. 갤러리와 공연장이 문을 닫았다 (...) 데이트 웹사이트에는 시답잖은 남자들이 줄을 섰다. 좋아하는 책 목록에 경영 교과서 이름을 진지하게 써 넣고, 데이트 장소에 자기 회사 로고가 박힌 배낭을 메고 오는 사람들이었다. 젊은 CEO들은 비슷한 부류를 만나 재미를 볼 작정으로 섹스 파티를 기웃거렸다. 바짝이를 뒤집어쓰고 팬티만 한 바지 차림으로 엑스터시를 찾던 내 친구들은 언젠가부터 퀴어 퍼레이드에 나가면 특정 브랜드 이름이 사방에 둘린, 누구에게나 위화감 없도록 꾸며진 원색의 행진 차량을 목격했다. 그 브랜드의 마케팅 책임자가 이성애자인 것마은 분..

2022.01.23

프랭클린 포어, 생각을 빼앗긴 세계

책을 읽다 보면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메타)만이 문제가 아니라는걸 조금씩 깨달을 수 있다. 책의 결론은 연결되지 않은 곳에서 사색을 하면서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가 쥐어야 한다는 내용이어서 어찌 보면 조금 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론을 도출해가는 과정이 읽어볼만 하다. 이 의기양양한 기술 만능론자들의 역사적 계보를 학습할 수 있는 좋은 책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 이 기술산업 종사자들이 혁신과 투명성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몰래 책을 스캔하고, 세금을 회피해서 가격을 낮추고, 우호적이지 않은 출판사들의 출판물을 노출하지 않음으로서 소비자들을 기만하는지 그들이 사용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서술한다. 어쩌다보니 진정성이라는 거짓말과 함께 읽게 되었는데, 비슷한 이야기를 정치철학자와 저널리스트의 시선에서 풀어내면 ..

2022.01.10

조해진, 단순한 진심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노년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관성이 되어 버린 외로움과 세상을 향한 차가운 분노, 그런 것을 꾸부정하게 굽은 몸과 탁한 빛의 얼굴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모습. 나는 얼른 고개를 도렸다. 타인을 보며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나의 미래를 연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43 왜 자꾸 누군가를 거둬서 먹이는 무해한 할머니를 그리는지 모르겠다.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것이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시집 가서 남들 밥 차려주느라 그 고생 한 할머니들이 왜 나이들어 소설속에서까지 여자애들 밥을 차려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 밥은 자기가 차려먹고 살자.

2021.11.17

손보미, 작은 동네

"이제 좀 안심이 된다." 뭐가 안심이 되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너의 인생이." 너의 삶. 너의 행복. 너의 안전. 그런 단어를 들으면 나는 열 손가락이 모두 바늘에 찔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83 그저 자신의 딸을 도와준 여자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일지도. 혹은, 그 여자의 어떤 면이 어머니를 매혹시켰는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진술은 사태가 끝난 뒤 비로소 완성된 의미 없는 술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은 진술이 있을까?) 어쩄든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면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02 2주 후 쯤, 번역 작업이 거의 끝나고 있을 무렵, 나는 아주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 모임에 나갔다 - 경기도 광주에 사는 친구는 나올 수가 없었다. "애기 땜에 내 몸이 ..

2021.10.03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자기에 대한 앎이란 그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겪는 자기를 알고 자기를 다루는 과정이지 고통의 원인을 알고 제거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 대한 앎은 고통의 이유를 원인으로 착각하여 마치 자기를 통제하는 것을 ㅌ오해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상태에서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만 채근하며 원인을 더 키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거되지 않은 원인은 대개의 경우 더 악화되고 더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닥쳐온다. 그럴 때 자기에 대한 앎은 무력하게 무너진다. 49 고통이 몸과 마음을 모두 장악하면 눈앞에 다른 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고통만이 타자이다. 그러나 그 타자와 주체의 자리는 바뀌어있다. 고통이 주체가 되어 타자가 된 자신을 응시하고 이끌어간다...

2021.09.17

김유원, 불펜의 시간

이런 강연은 기현이 즐겨 찾는 피로회복제였다. 교수가 여기 온 청년들이 희망이라고 얘기해주면 한 달 정도는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교수는 모두가 기대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피로회복제의 엑기스를 넘겨주지 않았다. "글쎄요. 저도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회학자는 현실을 보고 분석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발 늦죠. 희망의 실마리라는게 있다면 아마 저보다는 여러분들 가까이에 있을 겁니다." 강연을 들으러 왔다고 해서 당신들이 희망일 순 없다. 당신들이 기대하는 안이한 대답은 하지 않겠다는 거절이었다. 말의 내용은 완곡했으나 말투는 단호했다. 강연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기현은 강연뽕을 채쥠 소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 교수가 적어도 피로회복제를 파는 장사치는 ..

2021.09.06

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신체적 위생에 대한 배려는 물론 이 도시개발계획의 일면에 지나지 않았다. 도덕적 위생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핵심은 출생률과 가족적 가치를 장려하여 노동자들의 잦은 술집 출입과 그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알코올 중독을 근절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고려 또한 없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사회주의와 노동조합의 프로파간다가 가족 바깥, 즉 노동자들의 사교 장소에서 번성하게 될까봐 두려워했는데, 이러한 계획이 이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1930년대에 부르주아지는 이와 동일한 수단으로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부르주아 박애주의자들이 빈민을 위해 구상했던 가족복지 방식은 노동자들이 가정에 매이면 정치적 저항과 결사, 행동의 유혹으로부터 방향을 돌리게 될 것으로 예..

2021.09.06

잉그리트 폰 욀하펜,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히틀러 시대의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에 대한 책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쓰면서 나는 나치 철학의 끔찍한 본질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터무니없는'이나 '기괴한'같은 단어를 끌어다 쓰기는 쉽다. 하지만 그런 상투적 표현ㅇㅡㄹ 넘어 그 끔찍함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말로는 그 끔찍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히틀러의 제국에서 자란 나는 나치의 인종에 대한 집착이 세계대전과 절멸수용소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역사를 피해갈 수는 없다. 내 과거는 힘러의 친위대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인종에 대한 그들의 일그러진 집착 어딘가에 레벤스보른에 대한 진실과 내 태생을 알려줄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125 ㅇㅣ런 부역의 유산은 오래도록 씁쓸하게 남았다. 독일 곳곳의 ..

202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