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stri.destride 2021. 9. 6. 23:33


신체적 위생에 대한 배려는 물론 이 도시개발계획의 일면에 지나지 않았다. 도덕적 위생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핵심은 출생률과 가족적 가치를 장려하여 노동자들의 잦은 술집 출입과 그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알코올 중독을 근절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고려 또한 없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사회주의와 노동조합의 프로파간다가 가족 바깥, 즉 노동자들의 사교 장소에서 번성하게 될까봐 두려워했는데, 이러한 계획이 이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1930년대에 부르주아지는 이와 동일한 수단으로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부르주아 박애주의자들이 빈민을 위해 구상했던 가족복지 방식은 노동자들이 가정에 매이면 정치적 저항과 결사, 행동의 유혹으로부터 방향을 돌리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41

추상적인 수준에서 우리가 국민전선에 투표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악수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기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가족의 문제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 그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더라면? 그들이 책 읽기에 흥미를 갖도록 해주었다면? 공부의 당위성, 책에 대한 애정, 독서 욕구는 보편적으로 분포된 성향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개인이 속한 환경과 사회적 조건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성향이기 때문이다. 132

즉 선거 행위는 겉으로는 그 근본에서부터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집합적 동원 양식이나 타인들과 공동으로 수행하는 행동 양식으로 경험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개인들의 목소리의 총합이 개별 의지들을 초월하는 '일반 의지'의 표현으로 귀착한다고 여겨지는 '보편 선거'체제의 원리 그 자체를 위반한다. 내가 방금 언급한 사례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다. 투표함을 수단으로 계급 전쟁이 일어나고 투표 때마다 충돌이 발생하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회 계급 - 혹은 그 일부 - 이 다른 계급들에 대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세력관계를 정초하려 애쓰는 모습을 본다. 메를로-퐁티는 "투표가 직업과 생활 바깥에서, 휴식중인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그러니까 개인화와 추상화의 논리를 따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투표는 폭력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들의 투표를 거부한다." 154

물론, 노동의 변화, 그러한 변화가 구축하고 해체하는 개인 간 관계 유형, 그리고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치 담론과 담론적 범주들이 정치적 주체화를 틀 짓는 방식이다. 정당은 여기서 근본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듯, [정치적]대변자들이 그들을 위해, 즉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유리하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말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바로 정당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근본적인 역할이다.
조직화된 담론이야말로 지각 범주들을 생산하고, 정치적 주체로서 자기 이해 방식을 산출하며, 사람들이 자기의 고유한 '이해관계'에 대해 갖는 관념과 그로부터 비롯하는 투표 행위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 계급의 불가피한 자기 위임의 특성 - 드문 투쟁의 순간들을 제외하면 - 과 대변자들에 의한 [발언권] 박탈 상태의 거부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에 관해 끊임없이 성찰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대변자들에게서 더 이상 우리 모습을 확인할 수 없게 되면 또 다른 대변자들에게서 그것을 찾고 위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정당들이 정치적 삶에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 또 정당 지도자들이 정당한 정치장의 경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경계하고 항상 정당들을 의심하는 일이 엄청나게 중요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누가 결정 과정에 ( ) 관여하는지, 달리 말해 해결책의 정교화 과정만이 아니라, 중요하고 정당한 문제들에 대한 집합적 규 정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는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좌파가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며 욕망과 에너지가 투자되는 공간 내지 용광로로서 조직되기엔 무력한 실상을 드러낼 때, 우파나 극우가 그러한 문제 제기, 욕망, 에너지를 유인하고 수용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과제가 사회운동과 비판적 지식인에게 주어진다. 사회체 내에서, 특히 민중 계급 내에서 작동하는 부정적인 열정을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 이는 불가능한 과업이다 - 최대한 중화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지각 양식과 이론적 틀을 구축하기. 다른 관점들을 제공하고, 다시 한 번 새롭게 좌파라고 불릴 만한 미래를 스케치하기. 174-5

사르트르는 주네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경구에서 동성애는 누군가가 질식하지 않기 위해 창안한 출구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보다 동성애는 누군가가 질식하지 않기 위해 출구를 발견하도록 강제한다. 나는 내 사회적 환경과 나 사이에 만들어진 - 내가 애써 정초한 - 거리,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나의 자기-창조가 모두 내가 되어가고 있던 존재[즉 동성애자]를 맞이하기 위해 창안한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주변 사람들과 다르게 발명하지 않고서는 내가 되어가고 있던 존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