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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노 히데유키, 수수께끼의 독립국가 소말릴란드

100미터 정도 걸었는데, 10명이 말을 걸어왔다. 그중에는 거지도 많았다. 남녀노소, 지체장애인 할 것 없이 모두 손을 내밀거나 소매를 잡아당기며 한 푼 달라고 구걸했다. 다행히 그곳 거지들도 '초고속'이어서 고개를 저으면 바로 가버린다. 세계에서 포기가 가장 빠른 거지였다. 하지만 그곳 거지들은 소말리인이 아니다. 와이얍은 "거지들 대부분은 에티오피아인이다. 소말리인들은 구걸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정도로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있다 하더라도 구걸하지 않고 차라리 남의 것을 훔치고 만다"고 했다. 구걸하느니 차라리 훔친다는 말은 소말리인들의 자존심과 기상을 강조한 것이다. 45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 안에 더 확실한 그룹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2021.08.19

코바야시 타끼지, 게 가공선

일하지 않고 돈 버는 사람 있어. 프롤레타리아. 언제나, 이거. (목 졸리는 시늉.) - 이거, 안돼! 프롤레타리아. 여러분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 백명, 천명, 오만명, 십만명 모두, 모두, 이거. (아이들이 손과 손을 맞잡는 시늉을 해 보인다.) 강해진다. 괜찮아. (어깨를 두드리고.) 안 진다. 누구에게도. 알아? 응 , 응! 일 안하는 사람, 도망가. (쏜살같이 도망치는 시늉.) 괜찮아, 정말로. 일하는 사람, 프롤레타리아, 뽐낸다. (당당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 가장 훌륭해. - 프롤레타리아 없어. 모두, 빵, 없어. 모두 죽는다. - 알아?" 게다가, 그것을 교묘하게 국가적 부의 원천 개발이라는 식으로 결부시켜, 감쪽같이 합리화했다. 빈틈이 없었다. '국가'를..

2021.08.19

김멜라, 적어도 두 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그 유명한 이태원이야. 이태원에 가면 꼭 들른다는 남산이라고. 이태원에 가는 사람들은 밤새 술 마시고 놀다 다음 날 아침이면 다 같이 도서관에 가. 그게 코스야. 너 도서관 회원 카드봤어?" 미스터 X는 서울 시내 도서관 어디에서나 통하는 회원 카드를 보여주었다. 미스터X의 말에 따르면 이태원에 가면 IS가 모이는 아지트가 있는데 그들은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만나 밤새 이야기를 나눈 후 아침이 되면 남산으로 산책을 간다고 했다. 25 이 여정은 문화적 전유와 수행을 향한 것이다. 김완선의 노래를 '호르몬'으로 해석하면서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한 노래"를 이어 부르러 가는 길. 이는 일상의 곳곳에서 유쾌한 퀴어적 정동을 찾아내고야 마는 문화적 수행의 감각과 그 역사적 계보로 이어..

2021.08.19

네 눈동자 안의 지옥, 캐서린 조

와 읽다가 자는게 아까워가지고 거의 날밤샜음,, 근데 이거 완전 K-장녀의 K-시월드 체험기 아닌가? 다음 세대에는 지금처럼 불행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내가 문학과 이야기의 매력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숫자로, 확실한 것으로 관심을 돌리기를 바랐지만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수준이 너무 높은 그리스신하와 여러 고전문학을 읽으며 성장했다. 아버지는 명확한 사고를 하고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을 원했다. 우리가 현대사회가 주는 혜택을 멀리하고 세상과 떨어져서 본인이 정한 규칙 외에는 어떠한 규칙도 따르지 않도록 양육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나 대중문화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배웠다. 아버지의 관점에서는 모두 쓸모없는 ..

2021.08.12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외로움, 불안, 희망, 군더더기 없는 인물들, 인물들 간의 상호 작용. 오히려 이 소설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존재는 af인 클라라. "아마 없을 거야. 너 같은 에이에프는 당연히 없고. 그러니까 아이가 속상하고 슬픈 듯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유 리창 밖에서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마음 쓰지 마. 이것만 알아 둬. 그런 아이는 불만에 차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런 아이는, 에이에프가 없으니 틀림없이 외로울 거예요." "그래, 그것도 맞아." 매니저가 조용히 말했다. "외롭겠지, 그래." 23 "내 말 잘 들어 봐. 아이들은 툭하면 약속을 해. 창가로 와서 온갖 약속을 다 하지. 다시 오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해. 그런 일이 수시로 일어나. 그런데 그래 놓고 다시..

2021.08.12

천쉐, 같이 산 지 십 년

우리가 더 이상 사랑받기만을 갈구하지 않을 때, 더 이상 도망가는데 급급하지 않고 고통을 숨기지 않을 때, 그러나 침착하게 자신을 가다듬어 어떤 이들을 위해 긴 시간을 굳건히 애쓸 때. 우리 마음이 블랙홀을 벗어나 자신을 더 이상 괴물로 취급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배척하거나 혐오하며 상처를 줄 거라 여기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톱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선택할 줄 알며 실패를 받아들일 줄 알게 돼 비로소 좌절을 마주할 능력이 생길 때. 이해하기 힘든 슬픔, 회한, 후회를 차분히 바라볼 수 있을 떄. 그럴 때 거울 속 다정한 내 모습이 보이고 사람들 틈에서 선의의 눈빛을 구별해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따뜻한 빛을 뿜어내고 타인의 친절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역량이 있다..

2021.07.30

토마시 에드로프스키,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그때 나는 베니에크의 벗은 몸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의식했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 갈망에 놀랐으면서도 베니에크가 옷을 벗자 심장이 널뛰었다. 그의 몸은 단단하고 신비로 가득했고, 하얗고 넓적하고 강인한 것이 남자의 몸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했다.). 그의 유두는 내 것보다 크고 검었으며, 음경은 더 크고 길었다. 그런데 가장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우리가 가을철에 가지고 놀던 도토리처럼 그 끝부분이 벗겨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 가부간에 이 차이점은 나를 들뜨게 했다. 우리가 물기를 다 닦아내자 할머니는 우리를 커다란 담요로 감싸주었고, 그러자 마치 신비의 나라로 향하는 여해에서 막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 도취된 나의 마음 한 편에서는 뭔가가 아득한 아픔처럼 뜨끔거렸다...

2021.07.28

임성순, 자기 개발의 정석

"웃기죠. 남이 해 주면 보험이 되는데, 자신이 하는 도구를 사면 보험이 안 된다는 게." 전혀 웃기지 않았다. 이 부장은 진지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작고 흰 물체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6000번이 될 낯선 의사의 손가락에서 그를 구원할 물건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외게의 생명체나 기생충처럼 보였다. (..) "이게.. 뭡니까?" 질문은 했지만, 지금까지 겪은 과정을 돌이켜 보건대, 이것의 용도는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아네로스라는 미국에서 개발된 전립선 마사지 기구입니다. 사용법은 여기에 손가락을 거시면 되고요. 이걸 항문으로 집어넣어서 전립선을 마사지하시면 됩니다." 41 괜찮았다. 정말이지 이 부장의 인생에서 오르가슴을 느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괜찮았다. 100 주택가는 조용했고,..

2021.07.27

편혜영, 어쩌면 스무 번

한번 내지르면 다음에는 수월한 법이다. 악을 쓸수록 세상이 고요하고 온순해지므로 참을 도리가 없다. 비명이 터지기 직전의 기분을 잘 알았다. 가슴에 긴 끈이 걸린 기분. 조금만 캑캑거리면 끈ㅇ르 쑥 빼낼 수 있을 듯한 기분. 일단 소리가 터지면 괜찮아졌다. 끈이 빠져나오니까. 그런 일이 반복되면 비명을 지르는 건 신발끈을 묶었다 푸는 일만큼이나 간단해진다. 22 모두 술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미조가 어떻게 하면 술을 끊을 수 있을지 신경썼다. 그만 마시라고 하거나 술 대신 몰두할 만한 것을 권했다. 기분전환 삼아 여행 겸 딸네 집에 갔다오라는 얘기도 자주 했다. 근사한 풍광에 취해 술은 생각도 나지 않을 거라면서. 미조는 그게 좋았다. 사람들이 술 말고 자신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느 ㄴ사실이. 오..

2021.05.16

한유주, 연대기

학생때처럼 좀 덜 쫓기는 기분이 들 때 읽었으면 좋아했을지도...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자살하고 싶어서였다. 어떤 죽음에도 이유가 없듯 자살에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거나 기술의 발전으로 생각을 읽어낼 수 있게 되더라도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자살하고 싶다, 자살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릇처럼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폭력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 당한 폭력보다도 더 큰 폭력을 스스로 행사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복수의 방식이었다. 31-2 나는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책을 펼치고는 했어, 책에서는 늘 첫 ..

2021.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