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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숙, 억척의 기원

- 아버지, 술만 춰가지고 오면 뚜드려 패고 사람이 독하다는 건 뒤집으면 열정이지요. 많은 경우 그 열정이나 독함은 상처에서 시작되고요. 언니나 나나 어린 시절 아버지와 좋은 관계만 이어졌다면, 아마 평새응ㄹ 남자들이나 세상에 대해 순종적이고 순한 여자로 살게 되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특히 남자들 위주의 사회에서 여자가 순종하고 순응하며 사는 건 제대로 된 사람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그 미움과 상처느 날것으로든 가라앉은 마음으로든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하고 자꾸 재해석되어야 한다. 더 많은 기억이 떠올라야 한다. 아마 죽을때까지 재해석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미 죽은 아버지를 놓고 용서나 화해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만약 살아 있다면 더더욱 용서나 화해라는 말은 포장된 언어이거나, 상처가 남..

2021.05.12

백수린, 여름의 빌라

황예인 평론가의 해설이 무척이나 좋았다. 누군가의 글을 이렇게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기를 이북으로 읽어서 페이지는 무의미함 - 시간의 궤적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괜찮아요, 언니.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어떤 기억들이 난폭한 침입자처럼 찾아와 '나'의 외벽을 부술 듯 두드릴 때마다 이러다가는 내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겠니?" 언니는 나를 걱정해서 물었을 테지만 그 순간 나는 기분이 조금 상했다. 언니의 걱정이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때 그 ..

2021.05.12

2021 1분기 독서결산

1월말-2월 초에 아마 맹렬하게 읽었고 2월 후반부는 이사하다가 다 갔다 3월에는 입사해서 어리버리 까다가 도서관을 털어갈 작심을 했는데 회사에 확진자 나오면서 도서관 다시 닫음 ㅎ 따씨 no. 이름 저자 출판사 장르 월 1 소망 없는 불행 페터 한트케 민음사 소설 1월 2 에코의 초상 김행숙 문학과지성사 시 3 소녀 연예인 이보나 한정현 민음사 소설 4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 교양인 에세이 5 침묵과 한숨 옌롄커 글항아리 에세이 6 시설사회 장애여성공감 사회과학 7 부지런한 사랑 이슬아 문학동네 에세이 8 너 없이 걸었다 허수경 난다 에세이 9 숨 테드 창 엘리 소설 10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마음산책 영화평론 11 긴 여행의 도중 호시노 미치오 엘리 에세이 12 가만한 당신 최윤필 마음산..

2021.05.07

마거릿 애트우드, 먹을 수 있는 여자

임신, 출산, 결혼 이런데에서 고민하는 사람이 읽으면 좋을법한 책. 50년전 캐나다나 현재 한국이나 별 다를바가 없구만.. 모성 신화에 대한 생동감있는 서술들, 여전히 평면적이고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남자들의 모습 등이 꽤나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간만에 읽고나서 재밌는 이야기를 읽었다는 뿌듯함이 많이 느껴지는 책이어서 좋았다. 삶에 있어서 선택을 할 때에는, 특히나 관계에 있어서는 "이 사람 정도면 괜찮지.."같은 체념의 정서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걸 말해주는 점이 좋았다. 혼자 살면 어떻니 인간들아..제발 내 연애 사정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아다오. 시장조사는 손뜨개 양말 회사 같은 가내수공업과 비슷해서 가정주부들이 남는 시간에 일하고 건당 보수를 받는다. 벌이는 많지 않지만 그들은 집 밖으로 ..

2021.04.20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우한 생존기, 궈징, 원더박스

팬데믹 시대에 국가의 역할, 개인의 자유, 경제 활동, 봉새와 방역의 조건, 극도로 성별화되고 계급화된 '집'의 의미, 정치 지도자나 자본가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진단, 인류의 미래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이 요청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기의 공간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기록이라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추상적인 논의로는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12 재난 그 자체가 파괴적인 괴멸을 초래하는 상황에서, 재난을 처리하는 방식이 합리적이지 않으면 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심각한 상처를 입는다. 24 '내가 왜 이런 일을 겪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얼른 멈춰 버렸다. ..

2021.04.06

소준철, 가난의 문법

'가난'을 박멸할 수 있다는 정치적 선언도, '가난'을 무조건 긍정해야 한다는 낭만도 아니다. 정책을 구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필자의 처지에서, 이 책은 가난한 삶의 경로와 우연하지만 필연적이었던 구조들을 가시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단순하다.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이 그런 일과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에서는 재활용품 수집이라는 '재활용 정책'및 '재활용 산업'의 일부와 가난한 노인의 삶간의 관계를 파헤치려 시도했음을 밝힌다. 한 개인의 삶은 국가, 산업, 심지어는 같은 동네 주민인 우리들의 영향을 받아 이뤄지는 것임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한다. 13 이 소식을 들은 자식들은 서로 다른 말들 뿐이었다. 자신이..

2021.02.13

한정현, 줄리아나 도쿄

"말투에서 티가 하나도 안 나죠? 원래는 도쿄가 고향이에요. 오타루에 제일 오래 살기는 했지만. 그리고 원래 홋카이도 쪽은 사투리가 심하지 않은 지역이래요." 한주는 또다시 딸꾹질이 넘어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나지막한 두통과 함께였다. 그녀는 자신이 다만 일본어로 말할 수 있을 뿐, 정작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도쿄에 온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사실 한주에게 유키노의 억양을 평가한다거나, 도쿄를 다른 지역보다 우위에 두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의도란 말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사과의 말을 고를 때였다. 14 컵이 당신 상자의 귀퉁이가 비에 살짝 젖었던 것이 기억난다. 연인은 한주에게 그 상자를 ..

2021.02.13

니시카와 미와, 고독한 직업

그러므로 내게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한 인물을 우러렀던 경험이 없다. 만화 캐릭터든 운동선수든 내가 좋아하는 대상과 옆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은 다른 것이 당연했으며, 서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상대방의 취향과 기호에 어떻게든 맞장구를 쳐주며 자랐다. 그래서 역사 체험에서 우러나온 전체주의 알레르기는 아니지만, 모두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은 왠지 가식적이라고 느낀다. 그래도 인간의 마음에는 때로 환영이 필요하다. 홀로 걷는 길은 무섭다. 크든 작든 관계없이 내가 나아가는 길을 비춰줄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 그러니 나도 살아갈 수 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26 말투도 차림새도 턱없이 젊은이 흉내를 내고 있는 느끼한 영화 업계 아저씨 아줌마를 상대로 이..

2021.02.10

실비아 플라스, 진은영 옮김, 메리 벤투라와 아홉번째 왕국

"그리고 터무니없이 자잘한 구분들, 그걸 다시 구분하고 분류한 것들, 이모든 것에 익숙해질 거야. 제멋대로지, 바로 그거야. 제멋대로야. 그런데 요즘은 그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 작은 움직임 하나, 적극적인 몸짓 하나, 구조 전체가 붕괴되고 완전히 무너져 내리겠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메리가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물론 그럴 거야, 얘야. 내가 주제를 몰랐구나. 중언부언했어. 하지만 네가 여기 앉아 있으면서 기차에 탄 사람들에 대해 뭐든 특이한 걸 눈치챈 게 있을거야. 말해보렴." 40 "당신은 어떻게 아세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죠?' "이런, 믿음이 없는 아이군." 여자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나는 쭉 네 편이었어. 하지만 털어놓지 못했지. 네가 ..

2021.02.10

강화길 손보미 임솔아 지혜 천희란 최영건 최진영 허희정,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제목으로 오해했으면 큰일날뻔했네 최진영 임솔아 소설이 나는 제일 좋았다 능원은 어느 날 사라졌다. 작별 인사는 없었다. 능원의 연락처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아란은 그때야 알았다. 그의 본명도 알지 못했다. 능원은 중학생 때 감자칩 한 박스를 훔친 적이 있었다. 그게 능원의 가장 행복한 기억이었다. 능원이 키우던 개가 자신이 낳은 강아지를 잡아먹은 적이 있었다. 토란국을 좋아했다. 드림캐처를 좋아했다. 유난히 작은 자신의 외꺼풀 눈동자를 좋아했다. 칸나꽃을 싫어했다. 청설모를 무서워했다. 능원에 대해 아란은 알고 있는 것이 많았다. 그냥 그게 다였다. "갈 곳이 없어지면, 나를 찾아와." 아란의 얼굴을 바라보며 단영은 서 있었다. 목어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란과 단영은 목어 소리를 향해 걸었다. 요사채에..

2021.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