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stri.destride 2021. 9. 17. 14:56

 

자기에 대한 앎이란 그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겪는 자기를 알고 자기를 다루는 과정이지 고통의 원인을 알고 제거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 대한 앎은 고통의 이유를 원인으로 착각하여 마치 자기를 통제하는 것을 ㅌ오해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상태에서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만 채근하며 원인을 더 키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거되지 않은 원인은 대개의 경우 더 악화되고 더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닥쳐온다. 그럴 때 자기에 대한 앎은 무력하게 무너진다. 49

 

고통이 몸과 마음을 모두 장악하면 눈앞에 다른 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고통만이 타자이다. 그러나 그 타자와 주체의 자리는 바뀌어있다. 고통이 주체가 되어 타자가 된 자신을 응시하고 이끌어간다. .... 

고통은 소리치는 것 말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말은 고통을 묘사하고 설명하고 분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만이 아니다. 고통은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우리게에 묻는 것은 고통의 가치와 의미다. 억지로 외부로부터 갖답 ㅜㅌ이는 것이 아니라면 고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 통이 만일 무의미한 것이라면 고통을 통해 우리는 어떤 내면과 세계도 지을 수 없다. 말을 통해 소통되는 '의미'가 있어야 비로소 내면과 세계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54

 

주문과 방언으로만 말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말이다. 왜냐하면 그 말을 알아듣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신이요, 두번째는 그 주문과 방언을 공유하는 '공동체'다. 그래서 방언은 여전히 말일 수 있다. 새벽기도회에, 신흥종교 집단의 집회에 넘쳐나는 말, 그 말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이 아니라 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가장 말다운 말이다. ...

말로 만들 수 없는 공동의 집을 다시 짓는 말은 '소리'다. 어떤 말이든 담을 수 있는 소리를 공유하고 그 소리를 통해 소통하고 교감하는 공동의 집은 말을 뛰어넘는 존재론적 안정감과 실존적 의미를 줄 수있다. (..)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말, 그들이 공동의 집을 짓는 말, 그것이 바로 '소리'다. 67

 

세상의 가치와 평가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보통 이상의 내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의 뚜렷한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ㅁ여료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의 우려와 질문 공세를 이겨나갈 수 있다. 밖에서 명시적인 공격이 없더라도 자기 내면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에 맞설 수 있다. 보통 사람이 이 정도의 내공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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