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 작은 동네

stri.destride 2021. 10. 3. 20:05

"이제 좀 안심이 된다." 뭐가 안심이 되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너의 인생이."

너의 삶.

너의 행복.

너의 안전.

그런 단어를 들으면 나는 열 손가락이 모두 바늘에 찔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83

 

그저 자신의 딸을 도와준 여자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일지도. 혹은, 그 여자의 어떤 면이 어머니를 매혹시켰는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진술은 사태가 끝난 뒤 비로소 완성된 의미 없는 술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은 진술이 있을까?) 어쩄든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면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02

 

2주 후 쯤, 번역 작업이 거의 끝나고 있을 무렵, 나는 아주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 모임에 나갔다 - 경기도 광주에 사는 친구는 나올 수가 없었다. "애기 땜에 내 몸이 완전 녹아버린 것 같아. 어디도 나갈 수가 없어!" - 우리는 광화문에 있는 식당에서 만났는데, 두부 샌드위치나 샐러드 같은 건강식을 파는 곳이었고, 키오스크로 주문을 해야 했다. 누군가 우리는 이런 걸 하기에 너무 늙은 게 아니냐고 한탄을 했다. 식사를 하다가 나는 갑자기 생각이 난 사람처럼 윤이소라는 이름을 꺼냈다. 218

 

 

백수린도 그렇고 조해진도 그렇고 요새 작가들의 소설에서는 무너져가는 이성애 결혼 생활이 많이 등장하는 듯하다. 이 때 화자는 여성이고, 저 정도의 남자라면 괜찮겠다 해서 결혼했지만 결국 자신에게 굉장히 무신경한 남자들에게 질려 하는 그런 이야기.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경향은 예전의 한국 소설에서도 자주 드러나던 모습이었는데, 그동안의 문학 평론은 주로 남성 화자들이 자아 찾는 이야기에 너무 큰 스포트라이트를 주었다. 요새의 젊은 남성 문학도들이 소수자의 삶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데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 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데,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몰두할 열렬한 독자들을 스스로 잘 발굴해볼 생각을 안 하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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