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라스, 진은영 옮김, 메리 벤투라와 아홉번째 왕국

stri.destride 2021. 2. 10. 16:32

 

"그리고 터무니없이 자잘한 구분들, 그걸 다시 구분하고 분류한 것들, 이모든 것에 익숙해질 거야. 제멋대로지, 바로 그거야. 제멋대로야. 그런데 요즘은 그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 작은 움직임 하나, 적극적인 몸짓 하나, 구조 전체가 붕괴되고 완전히 무너져 내리겠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메리가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물론 그럴 거야, 얘야. 내가 주제를 몰랐구나. 중언부언했어. 하지만 네가 여기 앉아 있으면서 기차에 탄 사람들에 대해 뭐든 특이한 걸 눈치챈 게 있을거야. 말해보렴." 40

 

"당신은 어떻게 아세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죠?'

"이런, 믿음이 없는 아이군."

여자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나는 쭉 네 편이었어. 하지만 털어놓지 못했지. 네가 먼저 적극적인 결정을 내릴 때까지 난 널 도울 수 없었으니까. 그게 규칙들 중 하나란다." 58

 

반으로 쪼개진 세상이 해럴드 블룸 같은 이들에게는 무척 불길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쪼개진 세상의 틈에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슬픔과 고통이 흘러나온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슬픔이 나 혼자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기분 좋고 숭고한 감정을 느낀다. 이들은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불가능한 일임을 곧 깨닫게 된다. 71-2

 

스무 살은 한 사람이 자신의 결정에 따라 삶을 선택할 권리를 손에 쥐는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ㅏㄷ. 그 권리가 무엇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으로만 실현되는 건 아니다. 스무 살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부정과 거부를 행사하기도 한다. 메리 벤투라가 기차 여행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듯이 말이다. 기차 여행은 친절한 직원들과 화려한 식당차, 호텔 같은 안락함을 제공했지만, 그것이 여행을 계속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74-5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난장판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사랑스럽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려무나. 뭐가 어렵겠는가. 하지만 1951년에 열아홉살이 된 여자아이에게 그것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망가져버리고 만다." (1951년 여름) 76

 

"철학적 태도, 끝까지 술 마시고 끝까지 살아볼 것. 제발, 생각을 멈추고 맹목적으로 겁에 질려 순응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기를! (...) 아무 느낌도 없는 마비된 핵 속에 자신을 가두어두거나, 삶에 대해 회의를 품고 비판하기를 멈추고 쉬운 길을 찾아가는 일이 없기를 원한다. 배우고 사유하고, 사유하고 살고, 살고 배우고. 항상 이렇게, 새로운 통찰과,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사랑으로." 1953년 1월 

그러나 다르게 살고 싶다는 격렬한 열정은 그대로는 살 수 없다는 비극적 열정으로 쉽게 바뀐다. 마비된 상태로 자신이 버려졌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계속 찾아왔다. 신경쇠약과 세 번의 자살 시도. 결국 그는 1963년 2월, 원치 않는 목적지로 가는 기차에서 스스로 내렸다. 가장 과격한 방식으로 비상 정차를 감행한 이 여성 작가를 우리는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죽거나 미쳐야만 했던 그의 곁에는 달느 방식으로 탈출을 도와줄 친구가 없었다. 78-9

 

그 이름 모를 여자는 메리에게 기차 여행에 대해 알려주고 메리가 더 늦기 전에 스스로 판단하고 사유할 용기를 준다.

실비아 플라스는 새로운 방식의 탈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성과의 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 "오늘 밤까지 말이다. 나를 건드리고, 나로 하여금 자존심을 버리고 울게 해주고, 마샤는 얘기를 하고 말을 들어주었고, 그러자 내 갈비뼈를 에워싸고, 내 간장을 움켜쥐고 있던 긴장감이 스르르 풀렸다." (1952년 11월) 일기에 적힌 대로 그에게 마샤 브라운은 슬픔의 중요한 "출구"였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런 마샤와 따로 살게 된 이후 커다란 외로움을 느꼈다. 그해 12월에 탈고한 이 소설에서 우리는 불길한 기차 여행에 대해 묻고 자신의 불안을 말하며 커피와 초콜릿을 나눠 먹을 수 있는 지혜로운 여성적 존재에 대한 그의 갈망을 엿볼 수 있다. 81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은 친구들과 함께 모여 읽으면 좋겠다. 연기와 석탄재가 휘날리는 창밖의 풍경과 쓸쓸한 주홍색 태양도 친구들의 다정한 목소리 너머로는 조금 따뜻해 보이겠지. 너는 어디쯤에서 어떻게 내릴 거니? 너의 비상 정차 줄은 무슨 색이야? 서로 물으면서 한 문단씩 이어서 읽어가자. 소설은 짧고 우리가 모였으니 다른 것도 읽어봐야지. 버지니아 울프와 앤 섹스턴을, 최승자와 김혜순을, 이원과 김행숙을, 김이듬과 김경인을, 김민정을, 하재연을, 신해욱을, 강성은과 박시하와 박소란과 배수연을, 그리고 안희연을 .... 친구들의 아름다운 이름은 기차역처럼 만힉도 하고 기차 여행처럼 길기도 하다. 생생하게 살아서 고통 받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진ㄴ실의 틈들을, 문들을 계속 두드려보면 참 좋을 것이다. 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