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투에서 티가 하나도 안 나죠? 원래는 도쿄가 고향이에요. 오타루에 제일 오래 살기는 했지만. 그리고 원래 홋카이도 쪽은 사투리가 심하지 않은 지역이래요."
한주는 또다시 딸꾹질이 넘어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나지막한 두통과 함께였다. 그녀는 자신이 다만 일본어로 말할 수 있을 뿐, 정작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도쿄에 온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사실 한주에게 유키노의 억양을 평가한다거나, 도쿄를 다른 지역보다 우위에 두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의도란 말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사과의 말을 고를 때였다. 14
컵이 당신 상자의 귀퉁이가 비에 살짝 젖었던 것이 기억난다. 연인은 한주에게 그 상자를 집어던졌다.
'다 망가졌잖아!'
그건 평소에 그가 한주에게 자주 하던 말이었다. 화가 나면 그는 오로지 그 말밖에 못하는 사람처럼 반복적으로 소리쳤다. 실제로 무엇이 망가졌다기보다는, 자신의 화가 풀리기 위해선 한주가 망가지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한수도 한 가지 말만 할 줄 알아.' 81
"그런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악몽이고 지옥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7,80년대 기지촌문학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당시 성매매 여성들에 관한 자료는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의 자료보다 찾기 힘들었다. 다만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을 공장 노동자들의 자료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당시 야학에 열심이던 노동자들의 일부는 러시아문학을 직접 번역해 읽기도 했고, 수준급의 작곡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는 여러 수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등장했다. 그러므로 한주는 '모든 것이 악몽이고 지옥인 것만은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고된 노동으로 사람들이 쓰러져나가는 곳이 공장이었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ㅇ믕가을 듣는 사람들이 있는 고싱었으니까. 쉬는 날엔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퇴근 후엔 깔깔대며 서로의 지친 어깨를 주물러주던 곳이니까. 89
그녀는 ㅣ제껏 생각한 적 없었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러자 거부할 수 없도록 주어진 것을 자신의 선택인 양 받아들여야 했던 이들이 따라붙었다. 그 선택에 책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았을 사람들도 생각났다. 캬바쿠라의 사람들, 그 언니, 그리고 어머니. 101
"내가 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는지 알아?"
한주는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석사논문에 썼던 여성 노동자들, 그 시절 여성들의 이야기 말이다. 남자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자신과 함께해줄 남자를 기다리고, 그들과 가정을 꾸리기만을 고대하며 고단한 환경을 참아내는 것으로 귀결되던 여성들의 이야기. 남자에게 맞으면 그것 역시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마치 죗값을 치르듯이 자신을 파괴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한주는 자신이 그 여성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가족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 가족이란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식들이 있는 그런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주도 처음엔 그들이 그런 가족을 이루고 싶어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확실히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원했던 가족은 그저 서로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고 감싸주는, 좋은 일을 함께 나누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07
그날부터 유키노는 며칠 정도 생각에 잠겼지만 곧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마치 오래 기다리던 친구가 드디어 약속장소에 나타난 것과 같은 안도감까지 느꼈다. 더 자라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성소수자를 드러내놓고 비난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분위기는 성소수자에만 한정된 건 아니었다. 유키노가 느끼기에 자신의 나라는 어떤 면에서든 대부분 잠잠했다. 그것이 평화로운 고요라기보다는 누군가의 비명을 숨기기 위해 입을 막고 있는 것과 같은, 폭발 직전의 고요함이라는 건 역시나 시간이 좀더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113
어머니는 추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까지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누구의 아이인지, 남편은 어떤 사람인지, 왜 낳지도 않은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지와 같은 쓸데없는 호기심들. 사람들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아니면서, 다정한 음성을 가장해 자신의 궁금증만을 채우려고 한다. 채워지면 금방 잊고 그 자리를 떠난다. 206
그런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하며 산다. 아마 어머니가 택한 배역은 엉뚱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그랬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이라고. 어머니는 그 방법을 자신의 상황에 맞게 약간 변형시켰다. 공격을 공격으로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그 공격 자체를 없어지게 만드는 것으로. 뼈 있는 말들이 쏟아질 때면 어머니는 그걸 받아치는 대신, 맥락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해대는 엉뚱한 사람이 되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머쓱해하면서도 자연스레 어머니가 만들어낸 전혀 다른 화제로 갈아탔다. 207
이제 질문을 받을 차례였다. 이즈음 그는 질문을 해주는 사람들에게 순수한 고마움을 느꼈다. 이전에는 자신의 의견과 다를 경우 공격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제는 달랐다. 좋은 질문, 아니 질문 자체가 귀하다는 걸 연구를 해나갈수록 느끼고 있었다. 매번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논문을 주누비하지만 제대로 이해하기는 커녕 열심히 듣는 경우조차 흔치 않았다. 이래서 선배들이 연구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관심을 견디는 인내라고 한 건가. 그는 특히나 오늘은 더욱 초조하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한 번 깨물듯 말았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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