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stri.destride 2021. 1. 25. 22:13

지성과 권력이 연결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구시대적 '반지성주의'세력을 건너뛰고 감정이 권력을 빼 버린 채 국민화된 것이다. 그것이 우파와 좌파 중 어느 쪽에 경도될지와는 별개로, 반지성주의조차 내팽개치는 '감정'적인 정치가 선택될 수 있다는 리스크 속에 지금 세계가, 그리고 그 일부인 일본이 있다.

이렇듯 '감정'이 우리 가치 판단의 최상위에 놓이고 '감정'을 통한 '공감'이 사회 시스템으로 기능하게 되는 사태를 이 책에서는 '감정화'라고 부른다. '감정'이란 ㄷ나순히 권력자나 사람들의 정치 선택이 '감정적으로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13

유코의 모델이 된 여성도 실존했는데, 현실 속 유코는 정치를 즐겨 논하고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는 지적도 있다. 헌은 그녀가 아무 사심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덴노의 감정과 일체화했다는 식으로 묘사했으나, 이는 너무 작위적이라는 연구자들의 비판과 검증이 끊이지 않고 있다. 33

 

그 결과 우리는 '감정'에 대해 이성적이어야 할 언어를 정치에서부터 저널리즘, 문학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파묻어버렸다. 우리는 우리에게 편안한 감정을 주는 언어만을 정치에, 저널리즘에, 문학에 요구했고, 그런 유저의 요구에 그들은 너무나 쉽게 굴복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에서 굳이 불쾌한 언어를 늘어놓으려 한다.

그러면서 다시금 묻고 싶은 것은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이 불쾌하다는 것의 의미다. 우리는 내면에 자신의 불쾌함을 관찰하는 중립적 제3자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공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판조차도 '감정'의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즉 타인의 '감정'을 모두가 함께 비웃는 감정의 소비가 한편에서 비대화되고 있다. 46

 

 

우리는 감정 노동을 소비하는 데 익숙할대로 익숙해져서 재난 피해 지역에 '용기'를 전할 때조차 그와 동시에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재난 피해자에게도 '감정 노동'을 요구한다. 지원자들은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용기를 얻을'것을 요구할 정도로 탐욕스럽다. 그렇기에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자원 봉사자나 주문을 외듯 서로 '용기'나 '힘'을 얻었다고 반복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후쿠시마에 대해서든 구마모토에 대해서든 부흥이라는 정치적 선택은 '공감'받지 못한다. 47

 

우리는 업무에서나 일상에서나 '감정노동'을 요구받고 또 요구하며, 그런 언어들만이 매일같이 규범화되고 있다. 

이러한 '감정'은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경제학적 분석이나 역사학의 집적 같은 것보다 단번에 '감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이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지성주의'라는 이름의, 간신히 존재하던 '지성'마저도 능가하는 '감정'의 정체다. 49

 

포스트포드주의하의 '감정 노동'및 기호를 조작하는 '정보 노동', 심지어 인터넷상의 행동 자체가 '노동'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비평이나 사회 이론 없이는 실감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실감하지 못하는 것과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실감하지 못하는'것은 실감하기 어렵도록 '구조'가 짜여있기 때문이다.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노숙인을 공원에서 내쫓으려면 굳이 물리적인 힘으로 배제할 필요가 없다. 벤치 가운데에 팔걸이 하나만 만들어도 벤치에 눕기가 어려워져 그들은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 경우 언뜻 보면 노숙인은 '자발적'으로 떠난 셈 아닌가. 물론 유쾌한 마음으로 떠난 것은 아니겠지만.

이와 같이 요즘 사회에서는 '관리'처럼 보이는 관리를 하는 테크닉이 여러 분야에 걸쳐서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도 예외가 아니다. 굳이 하나하나 검증하지는 않겠으나 인터넷이 항상 유저에게 최적화된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80

 

하지만 공주님의 선의로 사회 시스템이 바뀌는 일은 없다. 공주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자기 세계를 아주 약간 넓히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시종일관 계급이 더 높고 부감하기 쉬운 입장에서 서술된다. 

너는 네 트윗을 너무 좋아하잖아. 자기 관찰과 분석은 최고로 날카롭다고 생각하잖아. 가끔씩 다시 읽기도 하고 그러지? 너한테 그 계정은 따스한 이불 같은 거야. 신경 안정제지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어. 96

 

이야기에 일종의 형식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바탕에 '구조'같은 느슨한 것이 있다고 상정하고, 동시에 그런 애매한 것을 원형으로 삼는 '빌둥스로만'으로서 화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생성된다는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융 학파 쪽이 '작가'라는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이야기 구조의 이런 애매함과 관련해 나는 가까운 장래에 AI들이 제각각 나름대로 이 애매한 이야기 구조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