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미, 이호연, 유해정, 박희정, 강곤, 정택용,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stri.destride 2020. 11. 2. 18:17

 

그런데 거기 여성 노동자들과 만나서 얘기하면 고래고래 고함치고 소리 지르며 말하는 거예요. 

"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냐? 왜 이렇게 목소리가 커?"

"언니, 우리 공장에 한번 들어와봐. 그냥 얘기하면 안 들려."

기계 소음이 너무 심해 다들 난청이 된 거죠. 36

 

어느날 영업을 하다가 후배 하나를 만났는데 그 후배가 저를 붙잡고 울었어요. 언니는 왜 이렇게 사느냐고. 이화여대까지 졸업해서 왜 이렇게 사느냐고. 그래서 저는 말했죠.

"그런 말 하지마. 난 운동을 하고 싶어서 운동하고, 자식 먹여 살려야 하니 돈도 벌어야 해. 난 떳떳해. 하나도 창피하지 않고 당당해. 남한테 손 내밀지 않고 내가 노동해서 자식들 먹여 살리고, 내가 좋아하는 운동도 하잖아." 40

 

그해 여름에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를 창간했어요. 당시는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것 처럼 스스로 페미니스트라는 이름표를 못 붙인 페미니스트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프를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라고 명명했어요. 창간호는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특집이었고 나는 <예술과 폭력 사이에서 꽃피는 남근의 명상> 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어요. 네 명의 남성 작가 작품을 페미니즘 시각에서 분석하고 비판한 글이었죠.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는 글이었어요. 

페미니스트 잡지가 시기상조라고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주저하지 않았어요. 내가 가진 모든 노하우를 응축시켜 이프를 만들었고, 그 후에는 여성들이 손에 들고 제 발로 찾아왔어요. 새끼 치듯이 사람이 모이고 또 모였죠. 여성 독자들의 반응은 열화와 같이 뜨거웠어요. 71

 

이론적으로 수준 있는 얘기는 못 하더라도 보고 느낀건 이야기할 자신이 있을 정도로 내가 변했지. 민가협 회장이 나한테 "입에 돌을 채워놓았다고"할 정도로 전에는 말을 많이 안 했어요. 함부로 말하면 내 무식함이 드러날까봐. 말 잘못하면 실수할까봐. 근데 내가 민가협 회장을 두 번 하다보니까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졌어요. 우리는 산수 공부를 주산으로 했거든요. 그 주산이 머릿속에 딱 서 있는 것처럼 할 말이 생각나고 글씨가 내 눈앞에 보이더라고. 내 마음속에 할말이 그려지는 거지. 내가 한 말을 스스로 생각해도 "수준이 쫌 되네"할 정도로 말이 줄줄줄 나오더라고. 내가 활동한 얘기고 경험한 거니까. 실제로 내가 보고 느낀 이야기잖아요. 어쩄든 내가 느껴야 누구한테 설명도 할 수 있고 진심이 나오는 거잖아요. 내가 못 느끼면 말을 하기 어려운 거지. 135

 

우리 목요집회 할 때 국가보안법 없애면 간첩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말하면서 남자들, 영감들이 지나간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과 우리 생각은 너무 다르잖아요. 그걸 몰라줄 때 미치게 답답한 거여. 내가 설명을 잘 할 능력도 없지만 진실을 얘기해도 듣지 않는 거지. 이렇게 인터뷰하고 기록하는 것도 그런 사람들 설득하려고 하는 거 아니여?

민가협 어머니들이 많이 모일 때는 300명도 됐던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12명이 남았어요. 활동하는 어머니들이 적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해요. 예전엔 자식들이 수배 돼서 쫓겨 다니다 안기부에 잡혀 들어가면 면회도 안 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고문당한다는 얘기만 들었지. 엄마들은 눈에 보이는 게 없지. 변호사 면회도 안 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활동을 했던건데, 지금은 이런 부분이 많이 달라졌어요. 민가협이 사라진다면 좋은 세상이 온 거 아니여? 민가협이 활성화되면 안 되는 거지. 다만 우리가 민가협에 있는 자료를 보관하고 있어야 하니까 지금은 민가협이 사라질 수 없는 거지. 자료는 점점 훼손될 텐데 이 자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거 아니여. 138

 

그전까지는 몸과 마음을 바쳐 선명한 이슈 파이팅을 하고, 그런 것들을 통해 사회 전체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면, 그 일을 겪는 과정에서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좀 더 깊게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운동 자체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인데도, 음, 사람들의 위로가 그 사람의 마음에 와닿기 쉽지 않고, 주는 힘이 다른 사람들에게 동력으로 가닿기 힘들고, 같이하는 사람들과 제대로 잘 보고 잘 보듬어서 가는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함에도 실은 같이 가는 방법을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깨달으면서 마음 속에서 새로운 방식의 운동을 고민하게 됐는데, 그게 바로 인권운동이었어요. 마침 기회도 되고 인연도 닿고 해서 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됐고, 지금까지 그 언저리에서 살고 있어요.

저는 인권운동이 좋았어요. 피해자들을 비롯해 두루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보니 여러 사랆들을 들여다보게 되고, 그런 것들이 개인적으로 나 스스로를 성숙하게 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166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로서 저보다는 그런 분들을 더 보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분들을 잊지 않으면서 그 고통을 이제는 끝내야 하는거죠. 그러면서 이 역사를 부끄러운 과거, 절대 되풀이되어선 안 되는 과오로 선명하게 기록해둘 수 있으면 좋겠어요. 171

 

나는 일상적으로 국가폭력, 재난 참사 피해자들을 만나는데 늘 만남 끝에 확인하는건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다. 사회는 책임조차 모르는데 피해자들은 또 다른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을 떠안고 산다. 사회는 너무 쉽게 잊고 부인하는데, 가장 잊고 싶은 사람들은 가장 선명히 그 시간들을 기억한다. 사회가 과거라 치부할 때 날선 시선조차 감수하며 그것을 현재로 밀어 올린다. 이런 아이러니란.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상처인지조차 모를 삶들에 사회는 어떻게 다가설 수 있을까? 무엇으로 그 고통에 말을 건네고, 세상을 밀어 올리는 용기에 동행할 수 있을까? 173

 

하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면서, 지금 우리가 그런 문제를 고민할 때가 아니지 않나? 어떻게든 학생운동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고, 우리의 억울함을 증명해내는 게 시급한 문제지 않나? 이렇게 돼버리니까 여성 의제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들이 없어졌죠. 요즘 다시 페미니즘이 부상하는 걸 보면, 그때 학생운동을 국가보안법으로 탄압하지 않았다면 저 고민이 10년은 앞당겨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182-3

 

선거를 끝내고 겨울 지나 이듬해 봄, 그러니까 1998년 5월에 서준식 선생님이 계신 인권운동사랑방에 찾아갔어요. 제가 선생님의 그 한장짜리 글을 정말 마르고 닳도록 읽었거든요. 그러면서 다시 숨 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양심을 버리고, 신념을 버리고, 신의를 배반하며 산다는 게 이렇게 치욕적이구나. 제대로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일이구나. 내 고통의 근원, 국가보안법이 어떻게 이리도 사람의 영혼을 빼앗고, 사회적 목숨을 빼앗고,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걸 해명하고 바꿔야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상전향제에도, 사회안전법에도 맞섰던 서준식 선생님이 만든 인권운동사랑방을 찾아갔던 것이고, 바로 자원활동부터 시작해 상임활동가가 되고 지금까지 인권활동가로 살아오게 된 거죠. 228 

 

정의와 진보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평생에 한 번쯤은 절망적인 상황 속으로 내던져질 때가 있을 것이다. 고립무원의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희망과 믿음을 저버리기 위한 핑계를 찾게 마련이다. 정의와 진보에 대한 희망, 믿음을 저버리는 데 프래그머티즘만큼 편한 도피처는 없다. "한총련? 이름을 바꿔버리면 되지 않은가!" "감옥에 가느니 뭣이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리고 더 겸허해야 한다. 231

 

이 기록이 누구에게 먼저 전해져 닿을까 생각하니 함께 인권운동을 해온 동료들, 그러면서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이겠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내 얼굴과 삶을 아는 사람들이 내 심연에, 나조차 부끄러워서 외면하고 부인하고 싶은 상처에 대해 글로 먼저 알게 되는게 너무 싫었어요. 극복한 것도 아니고, 정리된 것도 아니고, 치유된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극복하고 정리하고 치유할지 여전히 모르겠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부끄러워 묻어둔 과거이자 현재의 나인데, 치부인데 .... 사람들이 내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기도 싫었어요. 고생 많았다는 토닥임도 싫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한 반응도 왠지 부자연스럽고, 동정이나 연민 같은 눈빛도 싫고, '네가 그런 애였구나'도 싫고, 다 싫었어요.

그래도 결국 오늘 이렇게 말하게 된건, 그래도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 시절 제 주변에 탈퇴서를 안 쓴 사람보다 쓴 사람이 많았지만 한총련 탈퇴서를 쓰고 다시 운동하는 사람들을 못 봤어요. 저처럼 탈퇴서를 쓰고도 운동의 언저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면 있긴 할 테지만, 저처럼 다 입을 닫아서 모를 수도 있고, 또 사회적 목숨이 사라진거니까 운동의 길에 남는 게 개인적으로 너무 가혹했을 수도 있고, 주위의 비난이 거셌을 수도 있고... 상황이 어찌됐든 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꼴이 됐죠. 그 시절 같이 운동했던 수많은 친구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소식조차 못 듣고 지내요. 애써 찾지도 않았고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다 큰 상처이지 않았을까? 외면하고 부인하더라도, 합리화하고 극복했더 하더라도 여전히 상처이지 않을까? 그렇게 아무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 지금 여기 있는 나부터라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한때의 일, 과거의 일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는 고통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기엔 내 영혼에 너무 깊숙이 새겨진 상처를, 종이 각서 한 장이 사람의 인생에 어떤 폭력이자 야만이었는지를 누군가라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한 줄 기록으로라도 국가보안법의 이 야만성에 대해, 고개 숙였던 자의 부끄러움에 대해 남겨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두려워요. 내 치부를 드러낸다는 게 마치 발가벗은 채로 광장에 서는 것 같아 무서워요. 내 이름으로, 내 얼굴로 나를 드러내는 건 더 이상 숨지 않겠다는 마음인데, 계속 흔들려요. 모르겠어요. 내일은 후회할지도... 235

 

주민분들이 일이 되든 안되든 제가 그분들의 마음 잘 알아주고 진짜 어떻게든 이기려고 애쓰는 것에 많은 힘을 얻었다고 말씀해주세요. 그렇게 함께한 일 중에는 2년 만에 해결된 일도 있고 5년째인데 여전히 같이 하는 일도 있어요. 만나는 분들께 꼭 그런 말씀을 드려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반드시 끝나요. 반드시 끝은 있어요. 그리고 져도 돼요. 할수있는 일들을 끝까지 해보고도 안 된다면 그건 우리가 지는게 아니에요. 저들이 바뀌지 않는 것 뿐이에요.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수는 없는 거니까 그 힘을 가지고 다른 일도 해봐요. 331 

 

국가의 권력으로 모든 걸 허용하는게 국가보안법이에요. 법 자체가 너무 무서워요. 무소불위의 힘, 엄청난 힘을 가진 법이에요. 지금은 고문을 하진 않지만 정신적인 압박과 사상 통제를 하고요. 국가보안법으로 수감됐던 사람은 사회에 나와서도 죽을 때까지 보호관찰을 받아요. 이사하면 이사 갔다고 신고해야 하고, 어디를 가면 어디 간다고 신고해야 한대요. 죽을때까지 국가의 통제를 받는 거예요. 3년 이상의 형을 받으면 누구나 그래야 한대요. 살인도 15년인데 이 법은 평생을 구속해요. 369

 

가부장제 사회에서 정치는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남성 국가보안법 피해자와 달리 여성은  - 당사자도 있지만 - 어머니, 아내 등 '가족 내 성역할 담당자로서' 시국을 경험한다. 반대의 경우는 드물다. 당사자가 여성인 경우에는 운동가와 여성 사이에서 분열한다. 남성은 남성과 노동자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하지도 않고, 이중 노동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성은 성역할을 벗어나 시민, 민중, 국민, 운동가, 지식인이 될 때 택일이나 이중 삼중 노동을 강요받는다. 380-1

 

앞서 말한 <분지>의 경우, 내용은 반미가 아니라 미국 여성에 대한 성폭력적 욕망인데도 반미소설의 원조, 민족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반미문학이 사회적 의제로 등장한 상황은 한국 사회 내부의 저항이 아니라 북한으로 인한 빌미 그리고 남한 사회의 탄압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반미문학은 '저항문학'이라기보다는 '피해자 문학'이었다. 저항과 피해의 차이는 크다. 이 차이는 한 사회의 남성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국 현대사의 고통은 남한 사회만의 남성성을 구조화한 배경이었다. 남한 사회의 젠더는 전통적인 통념대로 가정에서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 분업 이데올로기에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국가와 젠더의 상호작용이 주된 역할을 했다. 따라서 한국 남성성은 자국 여성과의 관계라기보다는 '한국 남성-미국 남성(주한 미군)-한국 여성'이라는 세 그룹의 정체성과 노동의 역학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한국 남성은 외세 혹은 국가 내부의 자신과 다른 진영에 관심이 있지, '여성 문제'는 언제나 사소하게 생각한다. 388

 

남성성이 자국 여성과의 관계, 가족에서 이루어지기보다 남성들끼리의 경쟁 논리ㅏㄱ ㅗ디고, 자신의 '대의'에 여성을 동원하는 것. 이것을 패권적(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여성은 동등ㅇ한 시민이 아니라 남성 사회의 '자원'이 된다.

이 책은 가부장제 사회의 근본 구조인 남성들 간의 투쟁에 동원되는 여성이, 스스로 그 위치성을 거부하고 시민으로서 거듭나는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 다시 말해, 이책은 여성들에 '대한'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남성성에 대한 질문이어야 한다.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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