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경비원의 일기, 정지돈

stri.destride 2020. 9. 10. 16:18

나는 야상의 유화책에 넘어가지 않고 재차 말을 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공부를 너무 안하는 게 문제라고. 무식해서 용감할 수 있던 시절은 끝났다고 했다. 술 마시고 여자들에게 집적대느라 공부할 시간도 없겠지만 말이다(이 말은 못했다)
(...)
대단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라고 했는데, 특히 이 중에서 에이치야말로 김혜순 김행숙 진은영의 뒤를 잇는 시인이 될 거라고 추켜올렸다(나와 기한오는 은근히 뭉갰다. 재능은 있는데 아직 어려 얘들은, 뭐 이런 식의 이야기였다). 
왜 다 여성 시인들이에요?
내가 말했다. 여자는 여자 뒤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여성혐오적인 거 아닌가, 애초에 김혜순, 김행숙, 진은영이 어떤 식으로 묶일 수 있나,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요인만으로 게으르게 묶은 거 아닌가 하는 식의 반문이었다. 
(...)
이성복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승리자의 미소, 찌를 문 가련한 물고기를 바라보는 미소, 진군을 앞둔 아방가르드의 미소였다. 그는 두르고 있던 머플로를 천천히 풀며 진정한 앎은 이름이나 지식, 정치적 올바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게 나와 에이치의 다른 점이라고, 에이치에게는 깊이에 대한 감각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나는 공부 좀 했지만 표면에서 파닥거리기나 할 뿐 내면을 들여다볼 줄 모른다고 말했다.
너는 아직 멀었어. 시는 그런 게 아니야. 
사태가 여기까지 왔을 때 나는 솔직히 말하면 정신을 조금 잃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진짜 정신을 잃었다기보다는 본정신을 잃은 것으로 해도 될 말과 안 될 말의 경계를 상실했고, 라캉 식으로 말하면 실재계로,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이드 속으로 곧바로 진입했다.
뭔 소리야. 솔직히 에이치 계속 칭찬하는 거 에이치랑 자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다 티나요. 
그리고 자꾸 밤에 이상한 연락 하지 말라고, 스무 살 차이 나는데 뭐 하는 짓이냐 쪽팔리게 따위의 말을 했고 사태는 격투 직전까지 급진전했다. 이성복의 입에서 씨팔 새끼 어쩌고 하는 육두문자가 튀어나왔고 기한오가 나를 뒤에서 붙들었고 에이치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폭풍우가 바 안으로 들이닥친 듯 했다. 이성복은 폭력적으로 돌변해 테이블을 연거푸 내리치고 술병을 깨며 난동을 부렸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게 그의 주사라고 했다. 한동안 잠잠했는데 내가 불을 붙인 것이다. 아무튼 뭐 나는 기한오와 에이치에게 끌려 밖으로 나왔다. 
커피 마시고 집에 가자. 
나는 거의 절하다시피 하며 사과했고 기한오와 에이치는 피곤한데 웃기긴 진짜 웃긴 것 같다고 했다. 
잘하는 짓이다. 나중에 할 이야기는 있겠네. 에이치가 말 했다.
나는 다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난 끝장이야. 
(어느 경비원의 일기, 정지돈, 59-63, 2018)

 

에콜42의 캐치프레이즈가 뭔지 알아?

뭔데?

코딩을 위해서 태어났는가?

헐, 너 그렇게 태어났어?

설마....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70-71

 

하이퍼리얼리즘이 아니고 그냥 리얼리즘 소설. 내가 주인공 남자가 짜증은 나는데 엄청 뭔가 맘놓고 미워할 수 없어서 (자상한 섹스나 어른의 섹스는 뭔데) 대체 왜 그런가 며칠을 생각한 결과....를 알았다. 시간 없어서 카톡 보냈던 것을 베껴둠. 

 

저는 이제서야 조금 정리가 된 것 같은데 .. 같은 책에서 글 쓰는 사람이 교수나 베스트셀러 작가 아니면 소단위의 구루같은거 하며 지내는거라고 약간 경멸조로 얘기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성복이 딱 그런 사람이잖아요 ㅋㅋ 그래서 약간 이성복을 소설에서 여러모로 까려고 안달나 있고 작가가 이성복 같은 사람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거같은뎅 다만 주인공이 이성복을 아주 죽일듯이 싫어하는 이유는... 이성복이 지적인 단련에 게으른 사람인것도 있고 어린 여자 밝히는 것도 있지만 특히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집적대는게 싫은거잖아요 
근데 당사자가 앞에 있는데 자기가 h를 좋아하는건 숨기고 (물론 이성복은 눈치깐 것 같고) 입바른 소리 늘어놓다가 술에 취해서야 속내를 드러내는데 거기서도 결국 뭔가 좋아하는 마음같은걸 굳이 모두 앞에서 말할 필요는 없지만 상대방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쟤랑 한번 자 보려고 그러는 거잔아요 이런 얘기를 하는게... 자기가 이성복 싫어하는거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쏙 빼놓고 다른 이유를 더 앞세우는게 너무 유치한거에요 으악,,,, 그리고 술먹고 이성 잃어서 소리 지르고 그러는 것도,, 자기가 엄청 지적인 사람인걸 글케 티 냈으면...😑 기분 나쁘다고 술 많이 먹고 폭력적으로 소리지르면 안되지 싶은데.. 삶이 꼭 그렇게 되진 않죠?ㅎㅎ 근데 유난히 한국 남자들만 그런진 모르겠지만 한국 남자들은 인간관계에 서툴고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 같아요 ㅎㅎ (한국 남자들은 성애적 관계를 맺는데에 있어서 굉장히 서투른데, 거절 당하면 엄청 분개하고 사랑을 표현하는데 서투르고 근데 '형들'에겐 아주 능숙하고.. 이걸 연습할 생각을 하지 않아서 짜증난단 내용) 표현이 거칠긴 한데 대충,, 인간관계에 서툴다는게 이런 뜻 입니다 보통 좋아하는 감정이 있으면 상대방에게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기가 누굴 좋아한다는 감정에 사로잡혀서 쩔쩔매는거같아요 거절당할까봐 엄청 두려워하고.. 거절 당하면 물론 속상하고 슬픈건 맞는데 화가 나는건 아 나도 차이고 화가 났구나 (이마짚) 하지만 그걸 상대방한테 드러낼건 아니잖아요? 감히 이러케 멋진 날 안 좋아해? 이런건 폭력이니까... 여튼 주인공도 약간 계속 자기가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까 전전긍긍하는데 이것도 약간 에잉 니가 글케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왜 관계에는 이렇게 서툰 점을 생각하지 않나... 해서 짜증이 났던 것 같습니다 🙄 근데 이런 면마저 리얼리즘이긴 하죠 인간으로 살기 팍팍한 세상 눈물이 나네요 사실 뭔가 지적인 것을 좋아하는 공동체라면 인간관계를 맺을 때에도 더 사려깊을거란 생각을 여자애들은 많이 하는거같은데 이게 아주 크나큰 착각이란걸 깨닫는데에 긴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운동권에서 만난 여자들은 대부분 좋았지만 남자들은 짜증났던거구나 하는걸.... 알게되는데에는... 긴시간이.....하지만 마냥 저 주인공을 싫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성복 앞에서 날뛸때 말고는 입을 다뭄으로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 아마 그래서 맘놓고 싫어할 수가 없으니 정리가 안 되었나봐요 소설속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곰곰이 생각한건 꽤 간만인듯요 🤔

 

사실 주인공 남자의 찌질함, 연애얘기 이런거 다 제껴두고, 야간경비원/코딩/글쓰는사람/한강산책/해커 이런 얘기들이 한 코에 꿰여들어 따로 또 같이 춤추는 모습이 아름답다.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빨리 읽고 선물받은 한겨레21 인터뷰를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