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동사무소에 갔다가도 이런 일쯤으로 가슴이 울먹거린다든가 하는 유아기적인 자기 설움이 무척 싫어요. 따지고 보면 남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자기 응석도 일종의 자기과시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23
생각해보세요. 우리 역사에 사랑이 개입해본 적이 있나요, 우리 정치사에 사랑이 있어본 적이 있나요? 속된 말로 뭐합네 하는 인물들이 권력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랑을 체험한 이야기가 있나요? 첩과 기생이 있었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시대는 꿈이 없는 시대, 재미가 없는 시대, 상상력이 없는 시대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회복하는 일, 사랑의 능력을 되찾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39
결혼이란 성숙한 남녀가 각기 자기 집을 떠나와 독자적인 제3의 가정을 꾸미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한 남녀 모두가 양가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 그런 입장을 취해야 마땅하고, 부모들 역시 자녀들의 그런 삶을 인정해주고 도와줘야지요. 그러고 보면 이제 '시집을 간다'라느니 '장가를 든다'라느니 하는 표현을 지양하고 '결혼한다' 혹은 '혼인한다'와 같이 남녀가 평등하게 대우되는 표현을 일반화해야 할 것이에요. 57
참 이상한 일이에요. 현대사회 속에서 다른 유형의 윤리나 관습 등은 단시간 내에 붕괴하는데 유독 가족 윤리만은 그 변화나 붕괴의 속도가 매우 더딥니다. 우리 사회 속에 아직도 존재하며 기존 가족 윤리의 붕괴를 경고하는 사람들이 소위 유림들이죠. 이들의 주장이 여태껏 유효하다는 게 그것을 입증하지요. 그러니 가족 사회 속에서의 나면 관계는 마치 정치권 속에서의 여야 관계 같은가 봅니다. 남성들은 분명 기득권자이면서 여성 상위니 경제권ㅇ르 빼앗겼느니 하는 말들로 여성들을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 밑바닥을 들여다보자면, 실제의 권한만은 조금도 내놓고 싶지 않은게 사실이지요. 59
제 생각으로는 결손가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이가 잘못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부모가 다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경우에도 비행 청소년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으니까요. 63
사실은 남자나 여자나 '나는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욕구나 보람을 갖고 살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자에게는 그걸 개발할 기회를 안 주고 행복의 조건을 미리 만들어줘서 그 궤도를 가게 하죠. 그런데 그것을 순조롭게 가는 여자가, 나도 많이 그랬는데, 딴 무슨 좌절을 겪은 것도 아닌데 이게 아니다 싶고, 어떤 본질적인 충족감이 안 오고 그러죠. 92
사실 기득권을 쥔 쪽은 깨어날 필요가 없는 거구요. 남자가 기득권자인 건 확실하잖습니까? 그 점은 정권의 관계하고도 참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경우 절대로 정권을 쥔 쪽이 그냥 내놓는 법은 없었잖습니까? 결국 빼앗지 않으면 아 ㄴ되고. 그러려면 조금 더 슬기롭고 표독스럽지 않으면 안 돼요. 달래지 않아도 주는 사람은 없어요. 93
효의 문제도 그래요. 효를 최고의 미덕이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처럼 사회보장제도가 갖춰져 있지 않은 곳에서는 효가 지고의 미덕이 될수밖에 없긴 하죠. 가정이 노인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효부는 있어도 효녀는 없거든요. (...) 효란 자기를 길러준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우러나는 가장 인간적인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효자는 효부 아내만 두면 저절로 되는 거예요. 남자도 여자 부모에게 똑같이 할 수 있나요? 지금도 친정 부모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164
선생님의 늙음은 기려도 좋을 만한 늙음으로 여겨지니 신기해요. 저도 역시 같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참을 수 없는 게 추하게 늙어가는 정정한 노인들이에요. 나이가 들수록 확실해지는 아집, 독선, 물질과 허명과 정력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집착 같은 것을 보면 차라리 치매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늙음을 추잡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는 선생님을 뵈면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천진난만해보여요. 그렇게 벗어나는 일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요. 늙음조차도 어떻게 늙느냐에 따라 뒤에서 오는 사람에게 그렇게 되고 싶다는 꿈과 희망을 주는 것 같아요.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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