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0224 성폭력 사건들에 대한 기록

stri.destride 2022. 2. 24. 23:10
한 달 동안 무지개행동의 <Kiss and Cry> 추모 행사를 열심히 준비했다. 행사는 내일이다. 작년 이맘때에 세상을 떠난 한 활동가에 대한 공론화가 있었다. 무지개행동의 추모행사 기획단도 긴급 회의를 열었다. 사내 근무시간과 겹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면으로 대신 내 의견을 전달했고, 그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이곳에 기록으로 남겨둔다.
 
*
성폭력 사건의 해결 수단으로 공론화가 등장하게 된 계기는 과거 다수의 공동체에서 성폭력을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젠더기반폭력이 대부분의 공적인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다. (나 또한 여러 번 비슷한 일들을 겪었고,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퀴어문화축제를 준비한다고 해서 성적 대상화의 대열에서 '열외'가 되고 그럼으로써 나에게 은폐되는 사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법적 처벌도 역시 미미하고, 사회 규범의 변화도 획기적으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나 일부 집단의 인식은 고도화되면서 나타나는 괴리와 절망이 사회 내부에 상당히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많은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인권활동가들이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서 활동가들은 논의를 해야한다. 하지만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말이 가해자 중심적인 한국 사회에서 주요한 증거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 단순히 피해자의 말이 다 옳다는 판단이 오히려 모두가 원하지 않은 (가해자만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계속 보아왔다.
개인적으로는 피해자가 공론화를 한 이후로는 자신의 말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퀴어판 성폭력'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이 낯설어 하겠지만, 그 일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이렇게 주목을 받기 이전에도 계속 있어왔던 일이고 나 또한 다른 성소수자한테 강간을 당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 사건은 여러가지 질문이 섞여 있기 때문에, 단순히 가해자의 흔적을 지우고 피해자에게 연대한다는 말로 끝내버려서는 더더욱 안 된다. 공론화 글에서 해결 당사자로 지목된 단위는 없지만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주최측은 명백한 유관단체가 되었으며, 이미 죽어버린 가해자에게 우리는 어떠한 질문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에서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점은 가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료 활동가였으며, 트랜스혐오자들의 지속적인 공격을 겪었고 성소수자로서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는 중첩된 위치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을 단순히 '가해자' 혹은 '피해자'라고 딱지를 붙일 수 없었다. (예전에 이 일로 동료 활동가랑 소리지르며 싸울뻔한 적도 있음..) 하지만 죽은 이의 과오는 우리가 명백히 남겨두어야 하는 유산이다. 그래서 나는 피해자의 뜻에 연대를 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고인을 추모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릴 수는 있어도, 그 사람에 대한 기록을 모두 지워버려서는 안 되고,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이야기 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책에 나와 있듯이, '우리에게는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있다.'
후대 사람들에게 과거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모두 도덕적으로 무결한 사람이라는 역사가 남겨져서는 안 된다. ('운동 선배/기성세대'라는 사람들이 과연 그러했던가? 그 기만을 바라보며 환멸을 느꼈던 적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없는가?) 과거의 사람들이 저지른 과오가 남아야 미래의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에게는 이 시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꼭 필요하다.
*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권김현영 엮음, 2018

'---'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0403 무슨 회사를 다니시는 거에요  (0) 2022.04.03
0313 책으로 배웠어요  (0) 2022.03.13
22021 그리워지게 될거야  (0) 2022.02.14
220118 아이구  (0) 2022.01.19
2112삼척  (0) 2022.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