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집, 오르한 파묵

stri.destride 2012. 9. 11. 13:20


1권

하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멀리서 들려 오는 기차 소리를 들었다. 기적 소리, 긴 엔진 소리, 칙칙폭폭 소리. 옛날에는 이런 소리를 좋아했다.저 먼 곳에 죄 없는 나라와 땅, 집과 밭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렸고, 쉽게 현혹되곤 했다. 기차 한 대가 지나가 버렸다. 이제는 달리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지 마! 베개가 뺨 밑에서 따스해졌다. p38


가련한 아이, 고양이처럼 접시 가장자리에서 한두 입 먹곤 했지, 나는 한 수저 더 줄까, 얘야 라고 묻곤 했지, 그러면 네 눈은 절망한 듯 커지곤 했어, 음식을 두려워하는 작고 창백한 며느리, 어차피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내 기도가 뭐가 필요하겠어, 그 아이는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그들은 삶을 부둥켜안을 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죽는 것만 알았다, 가련한 사람들, 이제 나는 간다, 봐요, 아이들이 내 팔짱을 끼고 있지요, p118


그들이 언제 깨어날 것 같아? 바보처럼 평온하게 자고들 있어, 멍청한 놈들, 바보 같은 거짓 평온에 파묻혀, 세상이 자신들 머릿속 오류와 원시적인 이야기에 적합하다고 믿으며 원시적인 기쁨을 품고 자고들 있어. 손에 몽둥이를 들고 그들의 머리를 치고 또 치며 깨울 테야! 멍청이들, 이 거짓말에서 벗어나, 깨어나서 보라고! p188



2권

하지만 단어들이 사람들을 흥분시켰던 때도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군가 안녕, 이라고 인사를 건네고, 당신의 말을 듣는다. 당신의 삶을, 나중에는 자신의 삶을 말해 준다, 나는 듣는다, 이렇게 해서 서로의 눈으로 서로의 삶을 보게 된다. p10


(중략) 기숙사에서 주말마다 아주 외롭던 것을, 나 자신과 외로움을 극도로 싫어하고 이모 집에서도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시절처럼 나 자신이 가련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모두 돈이 있는데 나만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발명을 해서 나의 창조성과 두뇌로 미국에서 부자가 되어야 해, 하지만 제일란, 이 모든 난관을 겪을 필요가 뭐가 있고, 미국이 무슨 소용이야. 네가 어디를 원하든 거기서 살자, 원하면 여기서도 살 수 있어, 터키가 그 정도로 형편없는 나라는 아냐, (중략) p46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들처럼,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한다면, 전부 포기하고 여기서 두문불출 한다면, 매일 게브제만 오간다면, 역사라는 것과 관련된, 시작도 끝도 없는 수백만 개의 단어로 된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면. p98


내가 살고 있는 세기가 모든 것을 굴절시키는 안경을 내 눈에 씌워 놓아, 내가 사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빌어먹을, 나는 내가 보았던 것을 사랑하기도 한다! p104



자 젊은 독자들이여, 역사와 삶을 원하는 대로 읽으시오. 그저 존재했을 뿐이오, 일어났던 모든 일이 이 안에 있소, 하지만 서로 연결하는 이야기는 없소. 원한다면 그것에 맞는 이야기를 당신들이 마늗시오. 그러면 젊은 독자들은 슬퍼하며, 이야기는 없나요, 이야기는 전혀 없나요 라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타당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물론 당신들을 이해합니다, 젊고, 평온하게 살 수 있고, 한 끝을 잡아 세상을 원하는 곳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기 위해, 도덕을 위해, 모든 걸 설명해 줄 이야기가 당신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나이엔 미쳐버릴 수도 있으니까. 나는, 당신들이 옳습니다, 라고 말하고, 수백 장에 달하는 카드 더미 사이에 조커를 끼워 넣듯이 급히, 종이에다, 

이야기

라는 단어와 이야기 내용을 써서 끼워 넣는다. 다시 한 젊은 독자가,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이지요, 어떤 결론이 나오지요? 무엇을 해야 하지요? 뭘 믿어야 하나요? 옳은 것은 무엇이고 그른 것은 무엇인가요? 삶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하나요? 삶은 무엇인가요? 이것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나요? ㅔㅈ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묻는다, p105-106


"나는 진짜가 될거야, 알겠어, 지금은 진짜가 아냐! 터키에서는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에게 매순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진짜가 되지 못하고 미쳐 버려. 터키에서는 미치지 않으려면 자신을 놔 버려야 해. 라크 안 줄거야?" p110


정말 좋았던 것은, 손에 들고 있던 그 책 때문에 뒤얽히고 복잡한 과거를 어쩌면 집에서 다시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힘 없는 나의 시선이 안달하며, 집에서, 이해할 수 없는 페이지들 사이에서 헛되이 배회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배회를 거듭하면서 다음 주에는 갈 수 없는 쉬크리 파샤의 집을, 그 곳에서 우리가 했던 것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이곳 내 침대 위에 누워 생각했던 것처럼. 넌 삶을, 단 한번의 그 마차 여행을, 끝나면 다시 시작할 수 없어, 하지만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다면, 그 책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호해도, 다 읽고 나서, 그 모호함과 삶을 다시 이해하기 위해, 원한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 읽은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어, 그렇지 않니, 파트마? p270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 책에 어쩌면 저의 젊은 날과 관련된, 진정 저의 영혼과 관련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인간이 젊었을 때 느끼게 되며, 일정한 나이가 든 후에야 삶의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이중성을 파헤치려고 했습니다. 젊은 날의 고통스런 부분은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이중성을 보는 것 인데, 이에 맞서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p274)





금방 읽을 줄 알았더니 미적미적 하다가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알고보니 이야기 서술자가 세명으로 해서 자꾸 변하고 있었네... 90살 파티마, 파티마의 손자 메틴, 파티마의 남편 셀라하틴이 다른 여자 사이에서 낳은 이스마일의 아들 하산, 이렇게 해서 세 명의 서술자. 그런데 서술자가 바뀐걸 말을 안해줌. 파묵의 초기작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글은 덜 아름답지만 대신 뭔가 내주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비슷한 구도가 흥미진진하다. 파묵의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터키 음식의 이름들, 유명한 터키 사람들의 이름, 기록 보관소에 관한 이야기들을 보다 보면 이 사람의 이스탄불에 대한 애착이 정말 대단하다는걸 다시금 느끼게 된다. 시르케지, 베이오울루, 위스퀴다르, 사원들, 니샨타쉬와 같은 지명들을 보아도. 이스탄불은 내가 기대한 것과 꽤나 비슷한 동네였고, 서울과 닮은 동네였고.... 이스탄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


많은 젊은이들이 나오고,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너를 원한다고 매달리지만 결국 모두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서로 정파가 다르다고 싸움붙고 좋아하는걸 망설이고 좋아한다고 놀림받고 그런것들이 사실 지금도 어쩌면 유효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고, 이 책의 백미..는 아마 파트마의 내부 독백과 외부 자극들이 계속 교차하는 부분이지 싶다. 진짜 치밀하게 써 나갔구나 싶은 부분.. 극중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절망이 좋았다. 이 사람 책에 나오는 길고 긴 문장들도 이제는 익숙해지는거같고..이제 내이름은 빨강이랑 순수 박물관만 남았다 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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