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파국을 치달아 가는 관계, 그러나 복구의 의지라고는 없는 관계에 대한 소설
끝을 향해 가지만 복구의 의지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고, 그것이 원래 그런 것인 마냥, 그래야 하는 것인 마냥 내버려두는 주인공들은 전쟁의 영향을 받아서인걸까 ...... 독일 카톨릭 사회의 부조리함을 꽤나 잘 드러낸 소설. 그와중에 가끔씩 튀어나오는 나른하거나, 영롱하게 반짝이거나, 달콤하거나, 뼛속까지 시린 문장들이 박혀있는 것이 꽤나 섬뜩하기도 하다.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느낌.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는 것 같지 않지만.
동생이랑 엄마가 우결을 보는 와중 나는 '이제둘이이혼하러갈거같은소설을읽으러가야지!'라고 말하고 이 책을 끝냈다 으헣헣
책가방을 여는 데서 시작하여 어딘가의 사무실 의자 위에서 끝나는 죽음의 순환 속에 매여 있는 내 아이들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던 것이다. p16
친구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나는 으스스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친구는 2천 년 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가 까마득한 선사 시대를 배경으로 건물 관리인과 다투고, 지우개를 칠판에 던지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원시 시대의 선실에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소원하게 느껴져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일어서며 <자 그럼, 이만 실례...>라고 말했고 우리는 헤어졌다. p21
말끔하게 솔질한 그의 수단, 잘 손질된 그의 손, 깔끔하게 면도한 뺨, 이러한 것들이 초라한 우리 집을, 맛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 하얀 먼지처럼 우리가 10년동안 들이마신 가난을 생각나게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정의 내릴 수도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가난이라는 먼지는 나의 폐와 심장과 뇌에 쌓여, 내 몸의 순환을 지배하며 이제 호흡 곤란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참았던 기침을 터뜨렸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p68-9
나는 사랑을 나눌 공간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백만의 남녀들을 생각해 본다. p89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 사이, 우리 눈 사이의 이 30센티미터의 공간에는 우리가 서로 껴안고 보낸 수천 밤이 담겨 있었다. p146
내가 알았던 한 소위는 자기 애인한테 전화로 릴케 시를 읊어 주더군. 좀 다른 경우긴 해도 그는 곧 죽어버렸어.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불러 줬고, 전화로 서로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전화에 죽음을 실어 보냈어. 죽음이 전화선 속을 허우적 거리며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로 다른 사람의 귓바퀴 속에 죽음의 소리를 퍼부어댔어. 이 다른 사람이란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죽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이야. 고위 장교란 사람들은 사람이 떼로 죽지 않으면 대체로 전투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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