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고통, 수잔 손택

stri.destride 2012. 8. 29. 16:05

드디어 읽었다 이 유명한 책 \^ㅇ^/근데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는게 함정 ㅎㅎㅎㅎㅎ


시몬느 베이유 <일리아드, 또는 무력의 시>1940


예술적으로 말하자면, 도드라진 재주를 부리지 않은 사진일수록 훨씬 덜 조작된 것이라고 여겨지며(오늘날 고통을 담고 있는 잘 알려진 사진들은 대부분 조작된 것이라는 의심을 받는 처지에 놓여 있다), 될 수 있는 한 경솔한 동정심이나 동일시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p49


매그넘의 선언문은 윤리적인 부담이 가중되고 예전보다 확대된 포토저널리즘 작가드르이 사명을 명쾌하게 밝혀놓았다. 전쟁의 시기에서든 평화의 시기에서든, 광신적 애국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난 채 공정한 목격자의 한 명으로서 자신드링 활동하던 시대를 기록할 것. p59


사진이 부정확할 가능성도 늘 존재해왔다. 회화나 데생은 그것을 제작했다고 알려진 예술가가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라고 밝혀질 때 위조품이라고 판명된다. 그러나 사진(아니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영상기록)은 그것이 묘사하려고 했다는 장면을 둘러싸고 뭔가 관람객을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위조품이라고 판명된다. p74


사람들은 이 사진작가가 사랑과 죽음이 펼쳐지는 장소를 드나드는 스파이가 되어주기를, 그리고 사진에 찍힐 인물들이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방심 속에서"사진작가에게 찍히기를 바랬던 것이다. p87


실제로 발생한 죽음을 포착해 그 죽음을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만드는 일은 오직 카메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혹은 바로 그 직전)에서 곧바로 찍어낸 사진들은 가장 유명하거나 가장 자주 재생단되는 전쟁 사진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p93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p109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ㄷ싀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 밖에 없다. p110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중략)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자신들보다 어두운 피부를 지닌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광경을 사진에 찍어 전시하는 것도 이와 똑같은 일이다. 비록 적이 아닐지라도, 타자는(백인들처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p112-113


목격자로서의 사진작가는 극적인 것을 극적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도덕적으로 좀더 올바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극적인 것은 서구 역사의 상당기간 동안 [인간의]고통을 이해하려는 종교적 내러티브의 중요한 일부였다. p123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잇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리고 사진은 일종의 연금술로서,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받는다.(중략)

뭔가를 미화하는 것은 카메라의 전통적인 기능으로서, 이런 기능은 보여진 것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적 반응을 하얗게 표백해 버린다. (중략)뭔가를 고발하고, 가능하다면 사람들의 행동까지 변화시키려는 사진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p125


그렇지만 충격적이거나 슬프거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뭔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을 억누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습관화된 반응이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왜냐하면 이식과 삽입이 가능한 이미지는 실제 현실과는 다른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를 재현히 놓은 표현물은 신자들에게 전혀 진부한 것이 될 수 없다. 그 사람이 진정한 신자라면 말이다. 연출된 재현물에는 이런 법칙이 훨씬 더 잘 들어맞는다. p126-127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나 아렌트가 곧바로 지적한 것처럼, 집단 수용소를 담은 모든 사진들과 뉴스 영화들은 사람들을 오도한다. 왜냐하면 그 사진들과 영화들은 연합군이 진군해 들어가던 바로 그 순간의 수용소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체 무더기, 피골이 상접한 생존자들처럼 이런 이미지들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들었던 요소들은 전혀 수용소듸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감자들을(굶주림이나 질병이 아니라 가스를 사용해) 체계적으로 말살한 뒤 곧바로 소각해 버렸던 것이 이런 수용소들의 원래 기능이었다. p129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도 없다. 기억이라 ㄴ것은 그 기억을 갖고 있는 개개의 사람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 우리가 집단적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기하기가 아니라 일종의 약정이다. 즉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이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어떤 일이 어떠게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라고 우리의 정신 속에 꼭꼭 챙겨두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뭔가를 구체화 할 수 있는 이미지, 즉 중요하기 그지 없는 공통 관념을 담고 있으며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예측 가능하도록 움직이게 하는 재현적 이미지의 저장소를 만들어 둔다. p131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찾아가기를, 그리고 새롭게 되살리기를 원한다. p133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 p135


가슴이 미어질듯한 사진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줄 수 있는 능력을 좀체 잃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사진들은 뭔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사는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도록 만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은 뭔가 다른 일을 수행한다. 사진은 우리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이다. p137


그렇다면 또 다시, 우리는 누구를 비난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잔악 행위들 중 도대체 어떤 잔악 행위를 우리가 다시 되돌아 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일까? p142


종교적 사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유가 바로 이와 같은 고통의 관점,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점이다. 이 관점은 고통을 희생에, 희생을 정신적 고양에 결부시킨다. 따라서 고통을 뭔가 잘못된 것이라거나 불의의 사건, 혹은 일종의 범죄로 여기는 감수성, 즉 고통을 고쳐야 할 무엇, 거부해야 할 무엇,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으로 여기는 현대의 감수성에는 낯설기 그지 없는 관점이다. p149-150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p154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 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p167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진 채 고통을 쳐다본다는 이유로 이미지를 비난해 왔다. 마치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나 있기나 한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이미지를 통하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본다고 해서 그냥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p171


어떤 사진들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고문처럼 자신의 현실 감각을 심화할 수 있는 관조물로, 만약 될 수 있다면 세속적인 성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사용되려면 사진에는 그렇게 볼 수 있는 뭔가 신성하거나 명상적인 여지가 있어야만 한다. 대형 상점(또는 공항이나 박물관)을 공공 영역의 주된 모델로 삼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우연하게라도 진지해질 수 있도록 남아 있는 여지를 갖기가 힘들다. p173


몇몇 양심적인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작금의 풍토는 대개 그들의 사진이 다양한 방식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사진을 천천히 살펴보고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한 차분한 환경이 전혀 조성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표시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듯 하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지도자에게 애국심에서 우러나오는 경의를 표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관조적이거나 정적인 공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p175-177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인가를 꼭 들려줘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이 말해준다 해도]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전쟁이 벌어지던 바로 그 때에 포화속에 갇혔으나 운 좋게도 주변 사람들을 쓰러뜨린 죽음에서 벗어난 모든 군인들, 모든 언론인들, 모든 부역 노동자들, 독자적인 모든 관찰자들이 절절히 공감하는 바가 바로 이 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옳다. ㅔ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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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워싱턴과 그 밖에 다른 곳에서는 미국의 어리석은 첩보 활동과 방첩 활동에 관해서, 미국이 기존의 대외정책(특히 중동정책)대신에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에 관해서, 그리고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자동 군사방어 프로그램에 관해서 이미 수많은 토론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중들은 엄청난 현실의 괴로움을 견뎌달라는 말밖에는 듣지 못하고 있다. 

소련의 당대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만장일치의 박수, 자축의 박수는 한심하기 짝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관료들과 대중매체 논평자들이 독실한 신자인 척하며 만장일치로 무책임하게 지껄여대고 있는 말들, 현실을 감추려는 수사도 성숙한 민주주의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듯 하다.

지금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자신감을 부추기고, 슬픔을 조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오래 전부터 심리요법이 정치, 특히 논쟁을 수반하고 허심탄회함을 장려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대신해 왔던 것이다.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은 강하다"라는 말을 우리는 끊임없이 들어 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말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미국이 강하다는 사실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러나 꼭 강해지는 것만이 미국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바보가 되진 말자. 부록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