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철, 가난의 문법

stri.destride 2021. 2. 13. 20:05

 

'가난'을 박멸할 수 있다는 정치적 선언도, '가난'을 무조건 긍정해야 한다는 낭만도 아니다. 정책을 구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필자의 처지에서, 이 책은 가난한 삶의 경로와 우연하지만 필연적이었던 구조들을 가시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단순하다.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이 그런 일과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에서는 재활용품 수집이라는 '재활용 정책'및 '재활용 산업'의 일부와 가난한 노인의 삶간의 관계를 파헤치려 시도했음을 밝힌다. 한 개인의 삶은 국가, 산업, 심지어는 같은 동네 주민인 우리들의 영향을 받아 이뤄지는 것임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한다. 13

 

이 소식을 들은 자식들은 서로 다른 말들 뿐이었다. 자신이 돕지 않아도 잘 살아가길래 안도했던 둘째 딸 경숙이와 둘째 아들 준길이는 화를 냈다. 그 아이들의 입장은 영자씨와 달랐던 모양이다. 그 아이들은 왜 받은 것도 없이 우리만 엄마를 챙겨야 하냐, 첫째들이 그리 중해서 집까지 말아먹은 거냐는 둥 끔찍한 이야기를 해왔다. 그즈음 준호는 그 아이들을 달래보겠다고 만났다가, 싸움만 잔뜩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 순간을 떵로리면 영자씨는 아직도 심장이 뛴다. 그 이후 경숙이와 준길이는 영자씨와도 다른 형제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40-41

 

가난한 사람의 삶을 귀 기울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내가 이러다 가난해졌다고, 그 순간의 선택을 후회하는 모습 너머, 그 사람의 젊은 시절의 일과 지금의 하루하루를 들어 본 적이 있나? 한국사회에서 가난한 사람, 특히 가난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통계'나 '가난한 장면'을 통해 이루어지는 폭로와 경고의 형태가 많다. 더구나 '재활용품 수집 노인'이란 가난의 표상으로 쓰이곤 한다. 노인의 동년배들은 연민을 표하고, 이보다 젊은 세대는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실패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적 대처는 미미하다. 50

 

정부가 최소한의 지원을 통해 개인이 '자립'하여 곤궁한 처지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모습 말이다. 국가는 헌법에서 개인이 가지는 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국가는 자신의 의무를 개인에게 전가한 면이 있으며, 개인은 스스로 살 방법을 강구하며, 스스로 일어서야 했다. 131

 

더구나 우리는 노인들이 일하지 않더라도, 사회서 보호받을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그렇지만 노인일자리사업은 한국사회가 지금의 노인들에게 은퇴 후에 더 낮은 질의 노동을 하여 생존하라는 생애경로를 제시하고 있는 예로 여겨진다. 144

 

다음 절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동정과 시혜보다 기본적인 삶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변화를 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203

 

정작 노인들은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상당수의 노인들은 자신을 열등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에 대해 양가적인 감저응ㄹ 갖곤 한다. 대략적으로 표현하면 '고맙네'와 '내가 딱하네'사이를 오간다. 한 노인은 이런 얘기를 한다. 어떤 주민이 감사함을 가득 담아 "할머니들이 있어서 우리 동네가 깨끗해집니다. 애써주세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노인은 뒤돌아서 자신이 "청소부만치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라 하며, "지들이 드럽게 버린 걸 치우는 게 을매나 힘든지는 알고 저럴까."싶어 답답해했다. 206

 

게다가 이 일은 경쟁을 기반으로 작동하며, 노인들의 노력이 아니라 산업의 이윤에 따라 노인이 버는 돈의 액수가 바뀐다. 이런 상태를 '자립'이라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재활용품 수집 노인 중 상당수는 가난으로 고립되어 있다. 여기에는 국가와 이웃들이 접근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노인들과 지역사회가 상호의존하는 계기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근근이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자립보다, 함께 모여 서로에게 의존하는 자립이 필요하다. 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