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세상은 이렇게 생겼고 우리는 저렇게 해야한다며 마이크를 잡고 대중을 선동하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선명하고 단호한 시선 같은 것 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흘이 멀다 하고 거리에 나와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외치는 '전문 시위꾼들'사이에서 살아왔으면서도 동시에 마이크를 잡고 구호 외치는 걸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무대에서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라!" 하고 외치면 그 구호를 따라하면서도 속으론 '정말 그런 세상이 올까?'생각했다. 장애등급제라는게 보이지 않는 제도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생생하게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는 장애등급제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라고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 때문에 나는 내가 활동가로서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늘 생각해왔다. 애타게 갖고 싶었던 그 무언가가 나에게 생긴 듯한 느낌에 그날 나는 조금 감격했다. 21
글 속의 '나'는 현실의 나보다 더 섬세하고 더 진지하고 더 치열하다. 처음에는 그것이 가식적으로 느껴져 괴롭고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 힘든 글쓰기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임을 알게 되었다. 25
나는 그들이 부디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싸우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건 세상의 차별과 고통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곧 망할 거라는 징조이기 때문이다. 27
이 벽관의 문이 오래전에 풀렸다는 걸 갇힌 사람들만 모른다. 그러니 질문은 실상 나를 향한 것이다. 벽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앙상한 어머니를 밀칠 자신이 이쓴ㄴ지. 문을 열면 곧장 나를 덮쳐올 그를 업고 얼마간 전력질주할 체력이 있는지. 그의 손에 술이 아닌 다른 것을 쥐게 할 대안이 있는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35
감염인 당사자가 직접 자신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세상에 전해올 것이다. 당사자들만이 할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의 이야기가 그 정확하고 섬세한 언어 그대로 반드시 살아서 오기를 바란다. 이 사회가 그들 삶에 대한 난폭한 난도지릉ㄹ 그만두어서 그들이 결코 숨길 수 없는 것들을 숨기느라 자신의 귀핸 상을 다 써버리지 않기를,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던 그 이야기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를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며 기다리겠다. 40-1
집에 보내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하던 소년들에게 모진 매질이 가해졌다. 지옥 섬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년들은 한겨울에 바다에 들어가 굴을 캤고, 밤낮없이 뽕잎을 따다 누에를 먹였다. 어린아이가 오줌을 싸면 아이를 거꾸로 들어 맨 바닥에 머리를 쳤고, 어떤 날은 과자를 준다며 아이들을 모아놓고 신나게 두들겨 팼다.
이상민과 같은 날 입소한 여덟 명 중 두 명이 얼마 안 가 죽었다. 한명은 바다를 건너 도망치다 죽었고, 한 명은 저수지에서 시체로 떠올랐다. 소라와 낙지 같은 모드라운 것들은 죽은 소년의 몸에 붙어 눈구멍부터 파먹었다. 형편없이 망가진 시신들을 마을의 공동묘지 옆 맨땅에 관도 없이 묻었다. 개죽음이죠, 라고 이상민이 말했다. 그는 선감도에서 4년을 더 살다가 뒤늦게 사실을 알고 찾아온 엄마를 따라 그곳을 빠져나왔다. 111
세상의 변화는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 할 때가 아니라 '장애인에게 닥쳐온 어떤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작되며, 그것은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가는 90퍼센트의 사람들이 비로소 '비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성찰할 때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글쓰기 교육에서 만났던 그 장애여성으로부터 배웠으므로, 당사자의 말하기,ㄱ ㅡ 어려운 일을 그녀가 이미 해냈다는 점만은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125
악의적 왜곡이나 게으른 편견 같은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두 사람 사이의 공간. 당신의 긴 이야기를 함부로 요약하지 않을 것이며, 맥락을 삭제한 채 인용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공간. 그 절대적 안전함 위에서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떨림, 머뭇거림, 한숨, 침묵, '말할 수 없음'의 긴장이 만들어내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 진실은 잘 정리된 핵심에 있는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과 대답하는 사람의 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남을 배운다. 132
죽은 동생을 모욕하는 비수 같은 말들을 두 눈 부릅뜨고 읽어내야 했던 그녀의 봄.
"누가 그런 일 하겠다고 하면 말리고 싶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하지 않는게 좋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잘 아는 얼굴. 자신에게 닥쳐온 운명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에 나는 늘 마음을 빼앗긴다. 135
살면서 절대 마주할 자신이 없는 나의 봄이 생길 때, 나는 그 형제자매들을 생각할 것이다. 손잡고 배우고 이야기하며 떠났던 그들의 슬픈 여행을, 천천히 기어이 함께 도착했던 제주의 아름다웠던 바다를 기억할 것이다. 너무 아파서 차마 눈을 뜰 수가 없다는 이에게 눈을 감아도 괜찮다고, 다만 네가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던 그 따뜻한 눈길을 생각할 것이다. 135
그동안은 엄숙하고 비장한 증언들만이 시설 밖으로 나왔다. 이제 시설 바깥으로 나오고 있는 말들은 이런 것이다. 더듬는 말, 맥락을 알 수 없는 말, 뭉개지고 덩어리진 말., 까끌까끌한 말. '언어의 수용소'가 있다면 필시 갇히고야 말았을 '추하고 열등하고 쓸모없는'말들. 나는 어쩐지 어떤 견고했던 둑이 무너진 것 같은 해방감이 든다. 더 많은 짐작과 오해 속에 공동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함께 산다는 건 함께 이야기를 지어나가는 것이다. 돌아 갈 길이 '부서져야'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평생 국가의 추격으로부터 달아나야 했던 사람들은 방향을 바꾸어 일생일대의 대결을 시작했다. 나에게는 이것이 선감학원이라는 하나의 시설에 대해서가 아니라 가난에 대한 거대한 상식, 혹은 거대한 침묵을 진상규명하라는 것처럼 들린다. 국가의 폭력에 눈감았던, 가난을 뼈져리게 경험했으므로 가난에 굴복할수밖에 없었던 어떤 시대의 생조 ㄴ질서. 그러니 이것은 정말로 엄청난 대결인 것이다. 179
오직 '개같이' 번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한다는 자부심뿐이었는데, 사고 후 산재를 신청하자 공짜로 나랏돈 바라느 ㄴ기생충 취급을 받으며 그마저도 짓밟히고 말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 구조의 비열함에 한숨을 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지고 말았다. 192
처음 기정이 친척의 부축을 받고 찾아왔다던 그날처럼 나는 노들의 활동가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기정은 어떻게 살아야 돼요?"
폭풍을 함께 견뎌낸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말했다.
"음~ 기정 언니는 일단 밥을 먹어야 해요." 200
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사회를 꿈꾸지 않는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나 전태일처럼 살기를 ㅏㅂ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몸을 사리며 적당히 비겁하게 내 곁에서 오래 살아주길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 얼마간의 책임이 있고 어떤 의무를 져야 하는 것이다. 213
나는 끝내 들을 수 없는 것드을 평생 궁금해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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