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어쩌면 스무 번

stri.destride 2021. 5. 16. 03:08

한번 내지르면 다음에는 수월한 법이다. 악을 쓸수록 세상이 고요하고 온순해지므로 참을 도리가 없다. 비명이 터지기 직전의 기분을 잘 알았다. 가슴에 긴 끈이 걸린 기분. 조금만 캑캑거리면 끈ㅇ르 쑥 빼낼 수 있을 듯한 기분. 일단 소리가 터지면 괜찮아졌다. 끈이 빠져나오니까. 그런 일이 반복되면 비명을 지르는 건 신발끈을 묶었다 푸는 일만큼이나 간단해진다. 22

 

모두 술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미조가 어떻게 하면 술을 끊을 수 있을지 신경썼다. 그만 마시라고 하거나 술 대신 몰두할 만한 것을 권했다. 기분전환 삼아 여행 겸 딸네 집에 갔다오라는 얘기도 자주 했다. 근사한 풍광에 취해 술은 생각도 나지 않을 거라면서. 미조는 그게 좋았다. 사람들이 술 말고 자신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느 ㄴ사실이. 오직 미조만이 자신의 문제가 술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122 

 

마을 사람들은 권위적이고 엄격한 정호인의 간섭 아래서 엄마 없는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지 흥미롭게 지켜봤는데, 정소명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법을 진작 터득했다. 일관성을 지키면 되었다. 성적이나 옷차림, 머리 모양, 가방과 신발, 등하교 시간이나 인사하는 태도, 말버릇 등을 언제나 같은 정도로 유지했다. 조금이라도 달라지거나 남과 다르면 질문을 받기 마련이었다. 천편일률적이고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야 어른들은 문제가 없다고 여겨 마음을 놓았고 모범생이라 칭찬했다. 152

 

하지만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어머니 역시 어머니라는 것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나를 그저 자기 중심성을 갖춘 인간으로 대하며 항상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주었다.

한동네에서 오랫동안 미용실을 운영하다보면 사람들 머리보다 소문이나 말을 만지는 일이 많았다. 미용실에는 늘 사람이 많았고 그것은 어린 시절 나를 어머니와 함께 있지 못하게 했지만, 어머니가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든 수다스럽게 자신에 대해 털어놓는 법이 없었다. 개인적 문제나 불운이라 여기는 것을 스스로 조용히 해결해왔다. 과묵함은 미용실에 모이는 여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었고 아이만큼은 그 정도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을 것이다.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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