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베니에크의 벗은 몸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의식했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 갈망에 놀랐으면서도 베니에크가 옷을 벗자 심장이 널뛰었다. 그의 몸은 단단하고 신비로 가득했고, 하얗고 넓적하고 강인한 것이 남자의 몸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했다.). 그의 유두는 내 것보다 크고 검었으며, 음경은 더 크고 길었다. 그런데 가장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우리가 가을철에 가지고 놀던 도토리처럼 그 끝부분이 벗겨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 가부간에 이 차이점은 나를 들뜨게 했다. 우리가 물기를 다 닦아내자 할머니는 우리를 커다란 담요로 감싸주었고, 그러자 마치 신비의 나라로 향하는 여해에서 막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 도취된 나의 마음 한 편에서는 뭔가가 아득한 아픔처럼 뜨끔거렸다. 21-2
"누군가..." 나는 머뭇거렸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는 코웃음을 치고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줄지은 회색 이를 드러내었다. "치오타, 호모인 이상." 그가 이윽고 말했다. "언제나 고독할거다. 그리고 그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우게 될 거고. 아내와 아이까지 둔 부류도 있는데" - 그가 고갯짓했다 - "아까 너도 지나가는 걸 봤던 그 남자가 딱 그렇지. 근데 그런 놈들이 제일 저질이야. 그런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더 못견뎌 하는 거거든. 나는 최소한 싱글이잖아." 51
우리는 이 체제를 청한 적이 없었다는 진실을. 나는 수업 시간에 자리를 지키며 그 모든 걸 참아내면서도, 속으로는 베니에크가 추방당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명치에 차오르는 증오를 느꼈다. 쉬는 시간에 다른 남자애들과 싸움이 붙어 기어이 코피가 나거나 입술이 터지거나 하면 잠시나마 속이 풀려 자리를 뜨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절대 저들처럼은, 체제에 굴복하여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던 저들처럼은 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110
"푸코가 청년 시절에 무슨 프랑스 문화원의 원장직을 맡아서 바르샤바에 왔는데, 정보국에서 푸코의 성향을 알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어느 잘생긴 학생을 공수해서 푸코와 어울리는 무리에 집어넣은 다음 반드시 푸코가 반하도록 만들었어. 계획은 성공했지. 어느 날 푸코랑 그 학생이 둘이서 브리스틀에서 방을 잡은 그때 딱" - 너는 손가락을 튕겼다. '정보국 요원들이 들이닥쳐서 둘이 침대에서 뒹굴던 현장을 잡아낸 거야. 당국에서는 푸코에게 성매매 교사죄라는 죄목을 씌웠어. 일주일 뒤에 푸코는 사임했고 파리로 귀국했지." 네 목소리는 정보국 요원들의 유능함에 감명이라도 받았다는 양 거의 의기양양한 어조였다. 그러나 일순 네 얼굴 위로 불안이라는 잔물결이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알겠어?" 139
순간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목구멍이 죄어들면서 숨까지 막히려 들었다. 그동안 수년간 위에서는 우리에게 외국영화를 보여줌으로써 베를린 장벽 너머의 세상을, 우리는 가지지 못했던 자유를 훔쳐보도록 놔두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정말로 우리가 영원히 가만히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인가? 158-9
초록색 나팔바지를 입은 멀쑥한 남자애가 새 레코드판을 덱에 얹었다. 그러자마자 빠르고 경쾌한 비트가 열광적이고도 단도직입적으로 여념 없이 주르륵 흘러나오며 방 안을 달구고 주의를 모았다. 이윽고 우리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블론디의 세이렌 같은 목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면서 우리에게 전율을 선사했다. 우리는 가사 속 단어는 단 하나도 알지 못했어도 '하트 오브 글라스'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 그 노래의 고양감, 퇴폐미, 방종에서 오는 쾌락에 이르기까지. 셋이서 인파를 헤치고 방 한가운데로 나아가자 그녀의 목소리에, 고공비행하는 듯한 발성에,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선율에, 비트의 악상이라고 할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 자길 따라오라고 애걸해대는 그 비트에 온몸이 녹아들었다. 198
그 사람은 다 잡은 것을 기어이 얻어내려 작심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도 버틸 줄을 알았고, 위협의 수위가 올라갈수록 진일보하고 있다는 징후로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지금 자기 말에 따르지 않으면 내가 일평생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할 것이며 일자리를 구하지도 못할 거라는 말은 무시했다. 그가 태도를 공격적으로 바꾸어 나를 변태며 구역질 나는 남창이라고 불러도 무시했다. 스스로도 놀랍게도 그가 나더러 느끼라고 밀어넣는 수치심은 마음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남이 밀어 넣기에는 너무도 익숙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그 수치심을 너무나 오랫동안 빚어내왔던 탓에 그 순간에는 더는 수치심을 들일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도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종국에 그는 내게 이틀을 주겠다ㅗㄱ 말했다. 이틀을 줄 테니 이름을 떠올리라고. 나를 풀어주기 전에 그는 책상에 양손을 올리고 수술용 메스만큼이나 치밀하고 예리한 목소리로,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면 남은 일평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 나오면서도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바깥에는 밤이 깔려 있었다. 나는 겨울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가 어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258
그러자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동안 쭉 나는 그녀를 사랑했냐고 네게 물어봐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딱 그 질문 하나만큼은 물어보지 못해서 후회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야 질문의 답이 어느쪽이었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을 나는 깨닫는다. 왜냐하면 남들이 언제나 우리가 받고 싶어 하는 것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던 네 말은, 본인이 바라는 방식으로 사랑해달라고 남한테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라던 네 말은 옳았으므로. 그 누구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애초부터 우리 사이에는 장애물이 산적해있기도 했다. 우리에게 무슨 매뉴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하면 된다는 걸 보여줄 사람도 없었으니. 남자끼리 결합하여 행복해진 한 쌍의 선례랄 것이 아예 없었으니. 그러니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결국엔 행복을 거머쥘 자격이 있었다고 우리 스스로 믿기는 했을까? 284
게이 소설에 성장요소가 더해지면 고추 없이는 안되는건가....고추고추고추 그의음경..첫사랑의 페니스를 본 순간 느낀 강렬한 감정... 첫사랑의숨결...딱히 원하지 않았던 남자와의 첫섹스...게이들 화이팅하시오....특히 프랑스에 정착한 게이들이 쓴 책에서 느껴지는 묘한 도취감이 있는데, 박고 박히고 빨고 빨리는게 이 섹슈얼리티의 최대 범위인가 싶을때가 간혹 있다...뭐..그레이섹슈얼 호모로맨틱인 사람들도 요새는 제법 늘어나는 것 같다마는...
책 자체가 대립 구도가 굉장히 선명하다. 그래서 주인공의 고뇌가 더욱 잘 느껴지기도 하는데, 다만 이 대립 구도가 한 가지가 아니어서 지루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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