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술만 춰가지고 오면 뚜드려 패고
사람이 독하다는 건 뒤집으면 열정이지요. 많은 경우 그 열정이나 독함은 상처에서 시작되고요. 언니나 나나 어린 시절 아버지와 좋은 관계만 이어졌다면, 아마 평새응ㄹ 남자들이나 세상에 대해 순종적이고 순한 여자로 살게 되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특히 남자들 위주의 사회에서 여자가 순종하고 순응하며 사는 건 제대로 된 사람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그 미움과 상처느 날것으로든 가라앉은 마음으로든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하고 자꾸 재해석되어야 한다. 더 많은 기억이 떠올라야 한다. 아마 죽을때까지 재해석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미 죽은 아버지를 놓고 용서나 화해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만약 살아 있다면 더더욱 용서나 화해라는 말은 포장된 언어이거나, 상처가 남은 사람에게는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다만 되풀이되는 이야기와 기억을 통해 자기 상처를 직시하자는 것이고, 나아가 아버지를 넘어 타인의 처지와 상처도 역지사지하는 태도를 배워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모르겠고, 적어도 화자는 성숙할 수 있다.
- 잘 좀 살지 왜 다들 이혼하냐구요
억척이고 열정이고는 많은 경우 아픔 때문이더라고요. 미움도 애정 때문인 경우가 많고요. 아프게 산 사람들은 다 그걸 알더라고요.
- 부부 간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성생활
그녀와 내가 공조한 항목은,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 한 치 앞도 모르는 삶과 스스로 선택하여 살아가는 삶 사이의 길항 속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수긍하고 저항하는지에 따라서 정체성이 형성되고 계속 변태하며 나아가는 게 인생이다.
- 아들이 두부랑 축사 받아서 하고
남들 시선 혹은 사회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 남들과 사회에 의해 내속 깊이 뿌리내린 자기 감시와 자기 비난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의 도리'와 '가족 사랑'이라는 명명으로 자유를 구속하면서 보람이자 의무라는 명명의 자기 합리화에 도달한다.
- 못 배운 서러움과 울화
그라고는 내가 '이래도 내가 가서 데리고 와야 돼?'이러니까, '회장님 가만 놔두세요. 지 발로 오면 오고 말면 말고. 와도 지 발로 오게 놔 두세요. 근디 회장님, 그 애가 그게 병이에요' 이래. '무슨 병인데?' 했더니 그런 병이 있대요. 갑자기 돌변해가지고 우아래도 몰라보고, 그런 병을 자기도 봤대요. 그러니까 그런 병이 있다고. 근디 그러면 뭐 병이 좀 있다 해서 내가 거기에 심각하게 받아들이겠어요? 그라고 말았더니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나는 뭐 그만 두라 그만두지 마라 한 마디를 안했어요. 왜냐? 그만두지 말라고 하믄 내 책임이잖아요.
전여농에 내가 전화해가지고는, 'ㅇㅇ가 안 오면은 내가 상근하겠다. 내가 할라니까 ㅇㅇ한티 오지 마라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밟으믄 밟을수록 나는 일어나는 년이니까, 내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더니, '회장님 대단하세요, 꼭 이겨내세요' 막 그라드라고.
전에 무조건 사람들 좋아하고 퍼주고 했던 게 지금보다 더 옳다고 생각되지도 않고요. 사람에 대한 판단,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지요. 지금은 상처와 쉼의 기간이니 그 상처를 되돌아보고, 어떻게 전보다 더 성장할것인가, 단단한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판단과 숙성을 하는 기간이라는 생각이에요.
(특히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여자,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않는 여자들이 상처를 통해 오히려 열정이 많은 여성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서 보통 여자들과 다른, 자기 자신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느라 남편과 아버지와 혹은 자기가 성장한 원래 가족이나 시댁 사람들 혹은 자식들과 많은 갈등을 겪지요. 우선 자신이 많은 상처를 받고, 마찬가지로 상대에게도 상처를 많이 주고. 사회 활동을 하면서도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가까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갈등과 상처를 주고받게 되지요. 저 역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가장 힘들었고. 언니 이야기 들으면서 생각나는 게, 언니랑 나는 나이가 거의 동갑이지만 서울과 농촌의 차이, 혹은 사회문화적 차이는 많은데, 남성 중심의 사회 안에서 들은 비난은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자가, 여편네가, 애 엄마가 왜 그러느냐는 비난 말이에요)
후기_진심과 열정이 상처로 주저앉지 않기 위하여
많은 여성 주인공들은 이를 갈며 가부장제 속 아픔과 한을 토로하면서도 이에 대항하거나 깰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운명이나 팔자 타령을 하거나, 그 '정상가족'에서 밀려난 자신을 비정상이나 실패로 여기거나, '성공한 자식'을 목표 삼아 대리만족 하다가 그로 인해 다시 상처 받는 혈족중심주의에 머물렀다.
생애사를 제안한 청자이자 그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으로서 시대와 문화와 계층과 관계 속 주인공들의 상처나 이해에 공감은 하면서도, 그 상처가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애증하는 힘으로 뻗어 똬리를 튼 채 분열적이고 상호파괴적인 되풀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안타까움과 피로감과 갑갑함이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필자 서명에 자주 사용하는 "낮고 낡은 자리에서 신나는 마당을 함께"라는 격려를 나 스스로에게 보낸다. 철저하게 절망했더라도, 아니 철저하게 절망해서 오히려 더 낮고 낡은 자리에서 신나게 놀고 싶은 욕망과 기운이 다시 살아나는걸 보니, 아직 죽을 때는 아니다. 그 설렘으로 더 살자.
자신의 생각과 말조차 뒤엉키게 하는 열정과 한은 살아가는 힘이 되었고, 그 힘으로 자신과 타인을 뜨겁게 사랑했지만 속 끓이며 미워하기도 했다. 우선 그 시작은 어린시절의 빈곤에서부터였고,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와 그에 대한 해석이 이를 증폭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청년 시절의 공장 노동은 자립이자 즐거움이었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는 결혼과 함께 시댁 사람들, 특히 남편과의 갈등 및 상처로 이어졌고, 다시 경제적 자립과 여성 농민회 활동을 통해 해방과 열정으로 피어오르면서 미움과 상처의 도돌이표가 된다.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농사나 지으러 기어들어온 아들이 미워 죽겠다는 농민운동가의 이율배반, 그렇게 믿고 잘해줬건만 나를 '무시'한 대학 나온 농민운동 집행부의 젊은 것들.... 분열적인 상처이고 인식이지만 해독과 공감은 가능하다. 사실은 윌 모두가 그 비슷하다. 날것인 채 쏟아낸 그녀의 구술은 '나들'안에 숨겨놓은 다층적이고 분열적인 꼬락서니들을 끄집어내주며, 그 꼬락서니들을 이어 그녀의 분열과 상처를 이해하게 한다. 제발 이해와 공감에만 머물지 말고 딴지도 걸고 토론도 하면서, 타인의 시선 앞에, 잘났다는 인간들 앞에 당당히 맞설 인식과 힘을 키워내기를 바란다.
'무시당한 자들의 깨달음과 연대'야말로 서로를 키우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진짜 힘이다.
가족들의 지지 없이도 열정을 실현하는 여성은 숱한 비난을 감수하며 혼돈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일방적이랄 수는 없는 상호 간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혼인관계를 넘은 성적 자기결정권과 '자유로운 성'을 소신으로 삼는 필자로서는, 배우자의 외도로 괴로워하는 화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입으로는 적당히 공조하면서도 속으로는 몰래 결혼제도 속 일대일의 폐쇄적 성애를 강제하는 관습을 탓하곤 한다. 외도했다는 배우자야 내가 직접 그 발언을 들을 기회가 없으니 섣불리 욕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외도를 안/못하고 비난하며 사는 '갇힌 욕망'이 안쓰럽다. 모든 폐쇄적 관계는 내부 구성원의 욕망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망가질 수밖에 없다. 욕망이 아니라 폐쇄가 문제다. 그럼에도 소위 '피해자'들의 살 떨리고 이 갈린다는 감정의 감옥을 이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제도와 관습으로 인한 감정에 대해 개인만 탓할 수 없는 노릇이다.
미움과 분노와 회피 속에 시간을 흘려보내다 늙고 쇠해 피차 쓸모없어지고서야 상호 연민이라는 감성을 거쳐 회복인지 포기인지를 하는 부부간 성에 대해 필자는 '참 고생들 한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사랑이라고 명명된 한때의 감정이나 관습에 의해 결혼 하고 아이 낳아 가족을 이루어, 책임과 의무, 도리와 보람 삼아 납세자와 근로자와 소비자를 대대로 재생산해주는 시민들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와 자본주의의 공고함 앞에서는, 상상력과 전망의 출구를 잃어버린다. 다 늙어 혹은 늘긱도 전에 쓸모없다고 계산된 근로자를 노동시장 밖으로 내뱉어버리는 기업과 자본주의, 내버려진 근로자를 다시 가족에게 우선 떠맡기는 국가, 이를 떠맡아 어쨌든 굴러가게 되는 돌봄의 쳇바퀴로서의 가족.
나아가 이 갈등 장면 속 사람들의 수많은 차이와 맥락과 처지와 입장들, 조직의 결정에 대한 이해의 차이, 이른바 '가방끈'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감성 차이에 대해 갈등하는 당사자성을 떠나 함께 돌아보자는 것이며, 각자는 물론 조직이 이 갈등 장면을 통해 함께 토론하고 성찰하며 좀더 나아지지자는 제안이다. 당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 부모가 사랑 줬는데도 형제간 우애롭지 않아
(인간을 초월하는 영역이 있다고는 나도 생각하지만, 팔자니 운명이니 그런 건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쓸데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주고, 혹은 차별이나 억압이나 불평등에 대해서도 운명으로 여기고 살게 한다는 면에서, 저는 그런 생각에는 반대에요. 혹 내 앞에 불행이 오더라도 그걸 미리 알려고 하거나 피하려 하기보다는, '그래, 와라! 살아줄게!'라는 태도가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요. 성공보다는 실패, 기쁨보다는 슬픔에서 더 많이 배우고 성숙해진다고 보고, 고난이나 질병, 죽음도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언니의 지난 인터뷰를 풀면서 보니까 여러 대목에서 팔자나 운명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더라고요. 내 불행에 대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겠지만, 그것은 시행착오를 돌아보고 반복하지 않기 위한 깨달음을 배울 기회를 놓치게 하지요.
자신에게 닥친 고통에 대해 팔자나 운명 탓을 하거나 기껏 내 탓이나 부모 탓에 그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가난이나 고난, 결혼 생활이나 남녀 관계의 문제들은 사회구조적 측면이 크거든요. 저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든가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은, 가난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순응하면서 살라는 말이라는 면에서 아주 싫어해요. 언니는 언니에게 닥친 고통을 잘 견디고 자신의 길을 잘 개척해나간 사람이에요. 그 과정에서 힘과 지혜를 많이 얻었고요)
- 첫 결혼 그리고 이혼
그러니까 여잔 진짜 이혼하면서부터, 결혼을 깰 작정을 하면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궁리를 하고, 그러다보니 똑똑해지고 세상에 대처하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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