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예인 평론가의 해설이 무척이나 좋았다. 누군가의 글을 이렇게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기를
이북으로 읽어서 페이지는 무의미함
- 시간의 궤적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괜찮아요, 언니.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어떤 기억들이 난폭한 침입자처럼 찾아와 '나'의 외벽을 부술 듯 두드릴 때마다 이러다가는 내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겠니?" 언니는 나를 걱정해서 물었을 테지만 그 순간 나는 기분이 조금 상했다. 언니의 걱정이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때 그 말이 걸렸던 것은 어쩌면 나 역시 나의 충동적인 결정과 긔에 따라 갑작스레 변해버릴 나의 인생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때 이미 나는 나의 선택이 단순히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문화와 나라의 역사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을 감당하기엔 나의 각오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바깥은 먹색으로 가득했고, 어둠 속에서 흰 거품만이 주기적으로 부서져내렸다. 완벽히 새로운 삶이라는 언니의 말을 듣고 나자 나는 완벽한 유배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자각이 들었고, 그러자 알 수 없는 패배감이 가슴속에서 피어났다.
여름의 빌라
"남편이 유학 가면 아내가 학업이나 일을 포기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평범한 일이에요." 당신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내가 말했을 때 당신은 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습니다. "주아, 너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 자유가 있단다." 당신의 말이 내게 던졌던 파문. 고백하자면 나는 그후로 선택의 순간이 올 때마다 주문처럼 당신의 말을 떠올리곤 했어요. 남편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늦게나마 일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사원들을 바라보는 것이 싫어졌어요. 돌무더기에 핀 이끼와 그 위로 부서지는 빛은 틀림없이 아름다웠고, 무너져내린 것들 사이를 지탱하는 수백년 된 나무를 보는 일은 황홀했지만, 그것을 태연하게 향유하는 행위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살점처럼 버려진 돌무더기 위에서 영어를 쓰는 아시아계 관광객과 프랑스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폐허를 만드는 데 아무런 일조를 하지 않은 사람처럼, 이 모든 것이 그저 시간과 자연의 원리에 의해 훼손되었다고 믿으며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어. 거기에 만족하고 살면 그곳이 천국이야. 불만족하는 순간 증오가 생기고 폭력이 생기지. 증오와 폭력은 또다른 증오와 폭력을 낳고 말이야. 그게 우리가 지난 반년을 보내고 얻은 교훈이야. 그렇지, 베레나?"
지난 2016년 12월 이후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서 소멸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고요. 하지만 주아. 당신은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동안 자라고 있다느 ㄴ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 흑설탕 캔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내가 울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신에 차서. 하지만 꿈속에서 할머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돼." 그리고 할머니는 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조금은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주먹을 더 꼭 쥔 채. "이건 내 것이란다."
- 아주 잠깐 동안에
여주가 웃자, 맥주 한 잔에 취했을 리가 없는데도 그의 눈앞은 어지러워졌고, 깊고 푸른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도시의 소음이 아득히 멀어졌다.
-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선배들에게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존댓말을 쓰는 것. 그것은 초등학교와는 다른 중학교만의 질서였다. 교칙을 잘 지키는 것은 어린애 티를 벗지 못했단 뜻으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지만 야생의 질서를 습득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중요한 일이었다.
- 해설
언니와의 첫 만남은 나에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런가 하면 언니와 헤어져 돌아올때마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근사한 세계로 데려갈 무언가를 곧 만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1)'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온기를 얻고 사랑을 받는 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우리는 아직 숨이 남아 있는 관계를 어쩔 수 없다는 듯 방치한 채, 자신을 빼놓고 결별의 이유를 설명하는 수많은 버전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온 경험이 있다. 그러므로 조금도 두루뭉술해지지 않은 채 시작에서 결별의 장면까지 세세하게 돌아보는 '나'의 태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결연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상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때로는 함께한 시간의 밀도가 아니라 지속되어온 시간의 길이가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드넓은 시간과 느슨한 거리감이 배경을 이루어 그가 그려온 삶의 궤적을 ㄷ ㅓ선명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비좁은 세계를 지키기 위해 사나워지지 않아도 되는 방법 말이다. 그걸 미쳐 몰랐던 지난여름 우리는 서로를 아프게 한 채 헤어졌지만, 이 장면만큼은 기억하여 고통스러운 상실로 인한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작은 세계가 만드는 경계선 앞에서 수줍음과 두려움을 느끼는 마음을 짐작할 수만 있다면, 정당함을 주장하고 시비를 가리려는 모든 행위를 내려놓을 수 있다고. 그저 자신이 그러하듯 타인 역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점만 기억한다면 세계는 더이상 좁아지지 않으리라고 말이다.
우리는 앞서 언급한 다양한 층위들, 자신과 타인을 가르는 그 경계선들이 진실한 마음 하나로 관계를 이끌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폭력이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때 발생한다는 것 역시. 그러므로 "부끄럽게도 나는 그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느꼈음을 고백합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요."라는 주아의 말에 담긴 뚜렷한 자기 인식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준다. 3) 작은 세계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차이에 대한 다정한 호기심 또한 필요한 법이니 말이다.
복잡한 갈등을 외면하지 않은 채로 공존의 공간을 모색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떄 그 말은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ㅡㄸㅅ이 아니었을까. 낙관이나 비관으로 섣불리 기울어지지 않고, 손쉬운 납득을 위해 인물을 납작하게 그리고 싶은 유혹을 떨치면서 계속 이야기를 써나가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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