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현, 소녀 연예인 이보나

stri.destride 2021. 1. 4. 10:44

"이제 소녀 연예인들의 무대를 보기 위해 아사쿠사까지 견학을 갈 필요가 없어요." 기사 속 배구자의 인터뷰를 보며 희는, 어쩌면 국경을 넘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은 소녀 연예인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또 다른 소녀들의 숨길 수 없는 사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51

 

실제 조선에서도 카프를 중심으로 레뷰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긴 했다. 물론 식민지 조선의 레뷰는 제국의 스펙터클 전시장이 되어 갔으므로 그 시도는 오히려 소녀들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과연 카프가 당대의 사회 역사적 맥락을 제거한 채 무조건 그 소녀들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술 노동자로서의 여성은 1900년대에서 현재까지, 너무나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어떤 폭력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쩄거나 제국이든 그 반대편이든, 문화와 문학은 전선을 가장 빠르고 쉽게 넘는 강력한 무기인 동시에 선전 수단이었다. 다만 1900년대와는 달리 케이팝과 한국문학은 이제 한국에서 일본으로 그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물론, 누군가가 그것을 애써 모른척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79-80

 

할머니가 죽기 전까지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왜 고모가 제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거야? 용서를 구할 사람들은 시위대에 총을 쏜 사람들이잖아, 심지어 시위도 않고 횡단보도에 서 있던 제인에게 총을 쏜 그 사람들이잖아. 사람을 죽여 놓고 여장 남자라느니 불우한 어린 시절이 만든 불행이라니 하며 제인의 죽음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말을 하던 그 사람들이잖아. 그리고 고모를 이렇게 만든..... 아니, 나는 속엣말로도 그 말은 늘 하지 않았다. 이렇게, 라니. 나는 가끔 나를 불쌍하게 만드는 건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들의 시선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장 남자라는 말을 제인에게 붙이기 전까지 우리에게 제인은 그냥 제인이었다. 그러니 내가 저 말을 내뱉는 순간 고모가 이렇게든 저렇게든 되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고모가 제인에게 용거를 구한 건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는 것을 나는 할머니가 죽고 나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데에는 자격이 필요한 것이다. 111-2

 

이모, 이모 나올거예요.

뭐로 나와? 내가 기지촌에서 뭐 했는가, 뭐 얼마나 맞고 누구랑 하고 이런 거?

아니요.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날 인터뷰해? 나 인터뷰해서 뭐ㅜ에 써? 그런 거 아니면.

그냥 이모 젊었을 때 얼마나 예뻤나, 어떻게 살았나, 무슨 음악 좋아했나, 누구를, 누구를 그렇게 사랑했나. 이런 거요.

기지촌 여성, 성 노동자, 위안부 이런 거 말고....

네, 이모. 그냥 이모. 이모, 이선자.

선자는 무슨, 나 그 이름 싫어. 자 자 들어간거 다 싫다니까.

그래요, 미안. 나 또 잊었다. 잊지 말아야 할 거 이렇게 자꾸 잊는다니까요, 제가. 음. 그래, 캔디. 가죽 미니 스커트 좋아하고 다방에서 마시멜로 불랙커피에 넣어 마시는 거 좋아했던 이모 이름, 캔디요.

응, 캔디. 얼마나 달콤하고 좋아, 이 이름.

그래, 그게 이모죠, 이모 이름이고요.

그러면, 이제 내 이야기 하는 거야?

네, 그냥 이모에 대해서요. 기지촌 여성, 성 노동자, 윙나부 말고.

나, 그냥 캔디. 145-6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안았다. 나는 왜 모든 사람에게 있는 가슴과 배와 등과 목이, 또 어느 사람에게는 이다지도 각별한 감각으로 다가오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팔을 풀고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을 때였다. 180

 

"올 거지, 도쿄?"

사츠케가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사츠케를 바라봤다. 누군가에게 선뜻, 내가 갈게, 하지 못하는 삶이란 뭘까. 나는 많은 순간 말하곤 한다. 내가 갈게, 내가 할게. 너무나 당연해서 당연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런데 세상에 당연한 게 있나? 나는 다시 비행기를 봤다. 

(...)

제국은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에 갈 수 있는 강한 남성과 국가를 위해 순종하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이분법에서 벗어난 여성들은 서양문물에 빠져 소비와 타락을 일삼는 모던 걸이라 지칭되며 손가락질당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쉽게 조립되는 기계 부품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회가 긴 생머리의 여성상을 요구할 땐 짧게 머리를 잘랐고 발목을 덮는 길이의 치마를 원할땐 짧은 바지를 입었다. 원하는 남성에겐 언제든 사랑을 고백했다. 타락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그들 스스로가 원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모던 걸은 원래 자신의 선택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 그러므로 관광하는 모던 걸 또한 어디든 갈 수 있다.

"너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이제 오키나와로, 나하로 갈게." 204-5

 

경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무능한 남편과 평생 사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는 나은 결말 아닌가 싶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단 증조할머니가 아들 잡아먹은 년이라고 평생 할머니를 몰아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어머니의 병수발까지 한 건 역시 경아의 할머니였다. 참 알 수 없었다. 경아는 그 말을 삼켰다. 이 말이 더 하고 싶었으니까.

다시 태어나면 서울 가자, 할머니. 229

 

산 사람이 너무 울면 죽은 사람의 날개가 젖어 천국으로 날아갈 수 없다는 말에 눈물마저 참았던 할머니가 그 말은 미처 참지 못했던 것이다. 233 

 

수연의 시댁은 종갓집이었다. 명절이면 오촌 삼촌까지 와서 마당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곳. 처음 결혼한 수연이 그 분위기를 못 따라잡아 놀란 표정으로 멍하게 앉아 있었더니 사돈의 팔촌인지가 와서 대학 나와서 우리를 무시하냐며 수연의 등짝을 마구 때렸다는 곳. 언제부터인가 수연은 가끔 경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다닌다고 했다.

경아야, 대학 때 학생회 동기들이 날 보면 위선자라고 하겠지? 

수연의 그 말에 놀란 경아가 지금 어디냐고 물었지만 수연은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냥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수연은 그러고 약을 탔다며 이제 다시 집으로 간다고 했다. 237

 

이혼을 당한 안나는 애당초 서윤식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 안나가 기댈 사람은 수성뿐이었다. 안나와 수성에겐 그런 우정이 있었다. 그러니까 안나는 경준을 찾아가지도, 자신을 낳아 준 이를 수소문하지도 않았다. 수성은 안나가 떠난 후 간호보조원 일을 그만두고 새로 생긴 양과자점에 취직했다가 어느 일본인 사업가의 눈에 띄어 주점을 열었다고 했다. 만나자마자 그 일본인 사업가와의 일을 자랑하듯 늘어놓는 수성은 어쩐지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사람 같았다. 안나는 수성에게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낙관하자."

앞으로 돈을 모아 시카고로 가서 재즈를 배우고 흑인 남자와 아주 들척지근한 연애를 할 거라며 떠들어 대던 수성은 잠시 안나를 넘겨보았다. 그러고는 실크 장갑을 벗어 안나의 팔을 툭 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넌 역시 동경이 아니라 뉴욕 정도는 가 줘야 돼. 아메리카."

(...)

어쨌거나 어떤 것들은 또 여전했다. 그러나 하나의 물음이나 대답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는 게 또한 세상인 까닭에 어떤 것은 그토록 변하지 않아서 안심되기도 했다. 266-7

 

안나는 더 이상 간호원은 아니었으나 응급치료 가방을 들고 경성의 밤거리를 뛰어다녔다. 시위를 하고 싶지 않았어? 누군가가 물었을 때 안나는, 앞에 서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서 지켜보고 보살펴 주는 사람도 필요할 것 같아, 라고 말했고 그때 안나의 표정에는 어떤 결의나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다. 270

 

"배운 사람들은 남자랑 여자가 사랑하는 게, 아이를 낳고 국가가 정한 법을 벗어나지 않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안나 너는 알지? 이 수성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도, 이 우정도 사랑이라는 것을."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잡지며 신문이며 모든 곳에서 저주처럼 그런 글들이 쏟아졌다. 변태성욕자. 서로 사랑을 나누는 여성과 남성을, 남서으이 옷을 입은 여성을, 여성의 옷을 입은 남성을 변태성욕자라고 했다. 아내의 몸에 칼로 문신을 새기고 머리채를 잡아 기찻길로 미는 남성들에게나 붙는 말, 여자를 더녖 죽이지 않고서는 남성들은 절대 들을 일 없는 그 말은 그러나 안나와 경준과 수성과 같은 사람들에겐 너무나 자주 달라붙었다. 그 말엔 힘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건 그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라고 보는, '대서양 저편에 무언가가 있는 줄도 모르는 이들'이나 하는 말일 뿐이었다. 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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