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중독읻. 중독은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읻. 몸의 외부를 내부에 들여놓고 그들에게 '친구하자'고 애원하는 것, 그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이 중독이다. 10
'혼자서 본 영화'가 '나 홀로 극장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몸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 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역설적으로 천만 영화는 사라질 것이다(물론 배급 시스템이 문제지만). 내가 원하는 사회는 각자의 해석이 가시화되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이어지는 사회다. 13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19
그러니까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생각에 가두어 놓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혼자서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주인공들은 깨달았다. 41
여성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그 사회의 경계와 만나고, 결국 정치적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네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라고 말로이가 불평하자, 프래니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게 될까봐 두려워."라고 말한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정의되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 무기력과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대개의 남성들에게 여성은 '검은 대륙'이다. '검은 대륙'에 접근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성들이 짜증스럽고 히스테리컬하게 말한다. "도대체 요점이 뭐야! 원하는 게 뭐야!" 50
살아있는 한,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한, 인간은 언제나 사랑을 한다. 다만 그 대상이 바뀔뿐이다. 삶은 곧 움직임이고, 움직임은 변하하는 순간들의 분절적인 연속이다. 고로 영원한 사랑도 안전한 삶도 없ㄷ. 타인의 손을 잡는 것이 내 영혼에 사슬을 감는 행위여서는 안 된다. 키스는 사랑의 계약이 아니며, 애인이 주는 선물은 언약의 징표가 아니다. 70-71
현실은 이렇다. 미국 흑인 남성 인구는 전체 인구의 6.5%지만, 그들은 교도소 수감자의 40.2%를 차지하고 잇다. 타네하시 코츠의 세상과 나 사이 - 흑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미국에서 흑인 남성의 인생은 열일곱 살에 결정된다. 마약을 하거나 교도소에 가거나 총에 맞아 죽거나 학교에서 살아남거나...
그래서 문라이트는 약자에 대한 동일시 없이는 감상하기 힘들다. '흑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모든 장면이 아름다운 이영화를 온전히 몸에 담을 수 없다. <문라이트>의 아름다움은 자신의 존재(흑인이며 게이)를 존중하고 지켜내면서도 부드럽고 연약한 마음을 간직한 인물들에 있다. 내가 여성으로, 혹은 흑인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태어나서' 내게 적대적인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95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한다. '우리'의 상처가 크고 작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슈가 되면, 우리는 지배 집단과의 싸움보다 누가 더 큰 상처를 받았는가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문제는 '그들'이 사는 매커니즘 자체이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의 약함'이 아니다. 105-6
억울한 일로 평생을 불면의 밤과 싸우고 절망과 분노로 자신을 '망가뜨리는'이들을 종종 본다. 이들은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 생에서는 해결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116
이때 유일한 출구는, "나는 순수한 피해자"라는 정체성이다. 피해자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그런데 이 우월함의 근거는 피해자가 생각하는 정의가 전부다. 피해=정의도 아닐 뿐더러 누가 그것을 공감해주겠는가. 문제는 이것이다.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이 영화처럼 '송강호'도 없으며, 마지막 미용실 장면에서 만난 가해자 소녀와도 함께 살아갸아 한다.
나는 잠들기 전에 언제나 조용히 되뇐다. 잠들기 위해서. 구원, 해결, 복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118
가해자가 피해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정말 무식해서이고(대개 젠더 문제), 다른 하나는 지나친 방어 심리 때문에 상황을 분간하지 못하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리고 사람들은 왜 '가해자와의 대화'라는 역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대화가 이루어지면, 나아질 수 있으까. 그 기억을 털고 나아갈 수 있을까. 도대체 치유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묻을까. 잊을까. 무시해버릴까. 찾아갈까. 복수할까. 124
마츠코는 세상에 당한 것이 아니다. 세상과 싸웠다. 자기 방식이 옳음을 믿었다. 진정한 강인함이다. 완벽히 구조하된 가해와 피해의 양극 시대. 가해자/집단의 피해 의식이 판치는 시대에 정작 피해자인 그녀는 의연핟. 피해 의식만 가득한 사람은 마츠코처럼 타인을 걱정하지 않는다. 132
어려운 일이지만, 조금 힘을 내서 우리 자신을 지켜내는 바람직한 방식을 찾을 수 있으면 한다. 결국 자신의 역량을 믿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는 그 다음이다. 피해도 억울한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쁜 사람은 타인의 자존감, 의욕, 믿음을 도둑질한다. 마츠코가 내 앞에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다. 그녀의 보호를 받는 관객들이 행복한 이유다. 133
젊은 남자 원상은 여자 친구가 변심하자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피해자로 규정한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행동은 모두 정당화된다. 몹시 상처받은 '피해자'원상은 온몸을 면도날과 쌍절곤으로 무장한 채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여성의 몸에 피를 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그에게 상처받는다.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는 관계를 떠도는 괴물이다. 146-7
유대인 학살은 근대성의 모순이고 돌팔매질은 봉건적인 관습인가? 과도한 다이어트로 사망하는 서구 여성은 차도르를 둘러야 하는 여성보다 더 자유로운가? 이는 오래된 논쟁이다. 이슬람 여성이 마주한 폭력의 현실을 '비서구'사회의 야만성의 상징으로 인식한다면, 그건 새로운 식민주의다. 156
가장 큰 문제는, 남잗르이 그 많은 시간을 남자들과 보내면서도 그들 내부에서 친밀성을 해결하지 못하고 여성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고 그것을 채워주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거사를 앞둔 남자들, 적에 쫓겨 죽음을 눈앞에 둔 남자들은 하나같이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보, 오늘 밤 나 당신의 기도발이 엄청 필요해! 자지 말고 계속 기도해 줘.."
더 심각ㅎ나 재앙은 이제가지의 언설이 이런 남자들을 "불쌍하다, 여자에게 얼마나 의존적이냐"라고 해석해왓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남성 특유의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이다. 억압자, 착취자가 "불쌍한 사람"이 되었으니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성이 여성과 관계를 끊고(이후 남자는 여성의 노동만을 필요로 한다.), 가부장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을 그린다. 분리, 단절, 독립만이 인간의 발달 조건이라는 것이다. 정녕 그렇다면,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친밀성, 관계, 상처의 치유를 구걸하지 말아야 한다. 여성적인 것을 혐오하면서, 왜 그토록 여성에게 요구하는게 많은지 모르겠다.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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