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생각을 남편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털어놓으려면 자신의 부모 이야기를 해야만 하고, 그러면 남편은 분명 불신을 품을거라 생각했다. 아내가 제대로 된 엄마가 되지 못할 거라고. 081
주방 카운터 너머로 말을 건네며 리사코는 갑자기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연락 없이 늦게 들어와서 자기 멋대로 겸연쩍어하고, 멋대로 불쾌한 척하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왜 알랑거리며 비위를 맞춰야 하지? 129
모유는 뇌 발달을 촉진시킨다. 그것을 인터넷에서 조사한 계기는 시어머니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리사코는 기억해냈다. 시어머니의 말이 사실인지 알아봤던 것이다. 곧 그렇게 쓰여 있는 사이트를 찾아냈다.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어때이제 좀 나오니? 이렇게 물으며 그 무렵 매일 걸려오던 전화는 리사코에게 공격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잘 나오지 않는다고 솔직히 대답하면 한약이며 영양제 같은 것을 택배로 마구 보내왔다. 싫다고는 말하지 못한 채 서로 부담되니 그만 보내시라고 하라고 남편에게 완곡히 말했다. (...)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착하고 야무진 아들을 빼앗아갔다고 그러는 걸까. 물려도 저절로 젖이 나오지 않는 보통 이하의 엄마라서 그러는 걸까. 175
"사람을 사치스러운 명품족 아니면 소심하고 얌전한 사람, 꼭 이렇게 두 부류로 분류할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리사코씨는 아까 스토리를 엮어가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야 그렇지. 재판이란 원래 그렇게 진행하는 거구나 싶어..." 무스미는 아이스커피를 마신 뒤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우리가 할 이릉 피고가 악인인지 선인인지 정하는 게 아니야. 설령 그 피고의 절친이라고 해도 그건 알 수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지금은 무리해서 의견을 좁히지 말고 일단 마지막까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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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려, 정말. 왜 그런 소리만 하는 거야?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다들 피곤하다는 이야기. 요전번에 했잖아. 그런 교류회가 있다는 걸 알면 마음이 좀 편해지니까 그냥 얘기해준 거야." 352
이혼 의사는 없다. 아내를 지켜보고 함께 나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히사시를 재판원들은 분명 갸륵한 남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히사시가 정말 난폭한 말을 쓰는 살마인지도 모른다. 열받아서 점잖지 못한 태도를 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느 가정에서든 있는 일이다.그보다는 자식을 죽인 아내를 버리지 않기로 했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리사코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느낀 것은 절망이었다. 저 여자는, 자식까지 잃을 만큼 학대받은 저 여자는 그 죄와 마주보고 다시 세상에 돌아와서도 남편에게서 도망치지 못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형무소에 있다 나오더라도 자식을 제 손으로 해친 일은 그녀를 따라다닐 것이다. 더구나 히사시는 온화하고 교묘하게 표현을 바꾸어 가며 그녀에게 그 일을 끊임없이 들이밀 것이다. 목에 칼끝을 겨누듯. 380
엄마는 그야말로 깎아내리기 위해서만 말했던 것이다. 그 말에 딸이 진심으로 상처 입는 동안에는 딸이 자신보다 '작은 존재'로 남기 때문에. 417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상대를 깎아내리고 상처 입히고 그렇게 하믕로써 자신의 팔에서 떠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사랑하기에. 그것이 그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요이치로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의미도 없이, 목적도 없이 어느새 품고 있던 증오만이 아내를 깎아내리고 상처 입혔던 것이 아니다. 요이치로 역시 그렇게 사랑하는 방법밖에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요 며칠 사이 솟구쳤던 의문의 앞뒤가 맞았다. 요이치로는 불안했을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로 나간 아내가 자신에게는 없는 지식을 얻고 자신이 모르는 말을 하기 시작해,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이 지금껏 생각했던 만큼 훌륭하지도의지할만하지도 않다는 것을 꺠달을까 봐 불안했을 것이다.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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