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민음사

stri.destride 2014. 1. 30. 16:47



나를 보내지마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1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현대 영미권 문학을 이끌어 가는 거장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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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fi 소설 같지 않은 sci-fi 소설. 성장과 윤리의 문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자체가 접근성이 그렇게 높진 않다. 그의 문체는 담담하고, 섬세해서 어떤 이에게는 너무 길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는 등장인물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등장 인물들의 면면이 각각 뚜렷하게 다른 것도 아니고, 어떤 도발적이거나 충격적인 서술이 드러나지도 않으니까. 


다만 책 뒤에 써 있는 문구가.......책에 대한 스포였다 싶을 정도. 책 자체의 내용에는 뒷표지 문구처럼 명확하고 또렷하게 소설의 설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22장쯤 오면 소설 내부의 비밀이 차분하지만 급작스럽게 드러나고, 거기서 내 감정이 급격하게 변하는 걸 느낄 수는 있었다. 이제 성장소설을 읽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어버렸지 싶기도 하지만, 10대 시절의 관계의 흔들림이나 균열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성장 소설을 읽는 것은 성인된지 한참 지난 이의 입장에서도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 저 바깥 세상에는 마담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은 우리를 미워하지도 않고 해를 끼치려 하지도 않지만 우리 같은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고 우리의 손이 자기들의 손에 스칠까 봐 겁에 질린다는 것을 깨닫는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 자신을 그런 이들의 관점에서 처음으로 일별하는 순간의 느낌은 정말이지 등줄기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것 같았다. 59



부연하자면, 이 선임 커플들에 대해 나는 한 가지 사실, 그들을 연구한 루스조차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이 습관적으로 취하던 행동 중 많은 부분이 텔레비전 속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략) 서로를 향한 몸짓, 소파에 함께 앉는 방식이나 심지어는 말다툼을 벌이다 휭 하고 방을 나가 버리는 행동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170-1



"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는 부랑자나 인간쓰레기, 창녀,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 정신병자나 죄수들로부터 복제된거예요. 그게 우리 근원이에요. 우리 모두 그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말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거죠? (중략)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누구든 자신의 근원자를 찾고 싶다면, 진짜 그 일을 해내고 싶다면 빈민가로, 쓰레기통으로, 화장실로 가야 한독 말이에요. 그런 곳들이 우리가 시작된 곳이니까요." 232-3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신만이 알리라. 이런 일은 때로는 특별한 농담 같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의 소문 같기도 하다. 296



그녀가 대답을 기대하는 것인지 아닌지 나는 부녕하게 알 수가 없었다.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터였다. 그저 습관적으로 한 말일수도 있었다. (기증자들은 언제나 그런 식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312



"세월이 흐른 다음에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그 일을 보게 되었어. 그러니까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 결국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한두 커플은 실망했겠지만 나머지 커플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그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꿈, 하나의 환상이었을테니까 말이다. 그게 무슨 해가 되겠니? 하지만 너희 두 사람의 경우는 다른 것 같구나. 너희는 진지해. 주의 깊게 생각하고 주의 깊게 희망을 품은 것 같다. 너희 같은 학생들에게는 안된 일이다. 정말이지 너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단다. 하지만 어쩔 수 없구나." 353-4



"적어도 우리의 보호 아래 있는 동안에는 너희 모두가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게 우리는 신경을 썼다. 또한 너희가 우리를 떠난 후에도 최악의 거소가 거리를 둘 수 있게 배려를 했지. (중략) 하지만 나는, 너희의 안전을 보장해 준 데에 대해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꼈으면 한다. 이제 너희 둘을 좀 보렴! 너희는 멋진 추억이 있고 교육을 받았고 교양이 있어. 그 이상의 것을 해 주지 못하는 건 유감이다." 358



"이런 그래. 우리는 당시 시류를 타서 많은 지원을 받았단다." 359



"너희가 좀 더 분명하게 자각을 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지. 너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 너희가 누구인지, 무엇에 쓰일 지에 대한 자각 말이야. 그녀는 너희가 가느앟ㄴ 한 사실에 가까운 예상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어. 사실에 못 미치는 건 어떤 식으로든 너희를 속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거지. 그녀의 견해를 고려해 본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단다."


"어째서요? 어째서 그런 결론을 내리신 거죠?" 토미가 물었다.


"왜냐고? 그녀의 의도가 좋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너희는 그녀를 좋아했나 보구나. 그녀에겐 훌륭한 선새님이 될 자질이 있었지. 하지만 그녀가 하려던 건 너무 '이론적'이었어. 루시 웨인라이트는 이상주의자였고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현재의 너희에게서 아무도 뺏아갈 수 없는 어떤 걸 우리가 줄 수 있었던 건 원칙적으로 너희를 '보호'했기 때문이야." 366-7



그 철망으로 된 담장에, 특히 낮은 쪽 철망에 각종 쓰레기들이 걸려 있었다. 마치 해변에 잡동사니가 밀려와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바람에 실려 수십 키로미터를 날아와 그 나무들에, 두 줄의 철망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나뭇가지에도 깨진 플라스틱 판과 낡은 가방 조각들이 걸려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거기에 서서서 기묘한 잡동사니들을 바라보며, 텅 빈 들판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환상에 가까운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이상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 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