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바람소리/오키나와 북 리뷰 이렇게 세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람소리는 중편정도 되려나.
물방울과 바람소리는 서사를 갖춘 소설의 형태고, 오키나와 북 리뷰는 가상의 서평을 엮어놓은 형태의 소설이다. 오키나와에 대해서는 사실 미군기지 영역이 굉장히 넓고 평화운동이 일어났었다는 것 외에는 아는 점이 없다. (물방울 에서 나오는 림프부종 증세를 원폭 피해를 다룬 것으로 처음에 착각했으나 원폭 피해는 히로시마라는걸 곧 생각해냈을 정도로.) 류큐국이나 오키나와의 역사를 알아서라기보다는 그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중 일본어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었다.
나가사키, 히로시마, 오키나와와 같이 세계대전 혹은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합병을 당해야 했던 장소들을 다룬 책 중에 읽은 것은 거의없다. 사실 류큐국이나..일본의 부락민에 대한 이야기도 알게 된지 얼마 안됐다.
물방울이나 바람소리는 사실 전후 문학이긴 하지만, 오키나와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메도루마 슌 글 자체의 환상성이 얽혀들어 있는데, 중고등학교때 읽었던 한국 전후문학과 굉장히 유사한 느낌이다. 중고등학교때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 작품들은 꼭 원전을 구해서 다시 읽어보곤 했는데 (학교에서 따로 과제로 읽히는 작품들도 있었고) 오발탄, 수난이대, 흰 종이 수염 등에서 나타나는 전쟁중/직후의 피폐한 생활상이라든가 어린 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든가 하는 장면들이 많이 오버랩된다. 일본 전후문학이 보여주는 전쟁에 대한 기억이라는건 사실 한국 전후문학에서 나타나는 전쟁에 대한 기억에대한 묘사와 많이 다르긴 하지만(2차대전과 6.25 전쟁이므로) 그래도 '전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것인지?
일관되게 차분한 문체 그 와중 격렬해지는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이시구로 가즈오의 창백한 언덕 풍경이나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훨씬 환상문학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아슬아슬하게 피어나고 주변환경에 대한 묘사는 서늘할 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
오키나와 북 리뷰는 앞의 두 작품과 양상이많이 다르다. 오키나와인으로써 작가가 일본 본토에 던지고 싶은 문제의식들을 아낌없이 내보이는 작품이라고 할까.... 서평이라는 형식 자체가 그런 양상을 증폭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상의 서평묶음이지만 서평들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나타나고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가나타나며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안위를 걱정한다.
눈물 자국을 보이며 힘껏 손뼉을 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얼떨떨했다. 무슨 말이 아이들을 그렇게 감동시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뒤로 읍내의 다른 초등학교, 중학교는 물론이고 근처의 고등학교에서도 요청이 왔다. (..)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떠들던 도쿠쇼는 점차 상대방이 어떤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지 알게 되었고, 이야기가 너무 매끄럽게 연결되어도 호응이 신통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29
전쟁이 끝난 뒤 수용소 안에서재회했을 때, 세이키치는 이 불알친구와 더이상 나눌 말이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꼭 도쿠이치에게만 국한된일은아니었다. 강렬한 사실들이 켜켜이 쌓인 나날을 보낸 뒤로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조차 아무리 많은 말을 쏟아낸다 하더라도 진실을 전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66
돌아본 세이키치의 눈에 젊은 특공대원의 창백한 얼굴이 어렴풋이 겹쳐졌다. 세이키치는 상대를 찔러 죽이고 싶은 정도의 공포심과 함께, 내장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느껴질 만큼 힘껏 껴안고 싶다는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세이키치는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후지이의 가는 손가락을 꽉 쥐고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곧 후지이의 야윈 몸을 확 밀쳐버리고 다시 마을을 향해 내달렸다. 85-6
"무의미한 것 같지 않아?"
절벽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가노가 몸을 홱 비틀며 말했다. 후지이는 대답을 찾지 못해 가노의 말을 반추했다. 가장 두려워하던 질문이었다.
지난 일주일동안 자기 죽음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해봤지만 결국은 공허함만 느꼈다. 누구나 그 공허함을 응시하기 두려워 유서나 편지 쓰는 일에 열중했다. 후지이는 '천황을 위해'라는 말을 입에 담는 놈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참았다. 들이받을 대상이 없는 채 증폭돼가는 증오심. 그것이 후지이의 내부 여기저기를 갉아먹었다.
'무의미한것 같지않느냐고? 뭘 새삼스럽게.' 94
증언이란 무엇일까. 하나의 거대한 흐름에 몸을 실었다가 가로놓인 바위에 부딪힌 무수한 사람들의 국면이 언어로 정착되어 복원된 것. 그것으 ㄴ역사의 무수한 단편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하나가 나를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은, 거기서 숨쉬고 살면서, 당하고, 상처받고, 분노하고, 슬퍼하던 사람의 아비규환이 또렷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이리라.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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