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언덕 풍경, 가즈오 이시구로 작, 김남주 옮김

stri.destride 2014. 1. 6. 00:32



창백한 언덕풍경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11-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그래, 특별한 건 하나도 없었단다. 그저 행복한 추억이었을 뿐이...
가격비교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이었당..전후 일본이란..긴 여백. 섬세한 묘사. 다양한 사람들. 세대 갈등. 영국과 일본. 딸의 자살. 이복 자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렴. 한 집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각기 다른 정당에 투표하고 있어. 그런 문제에서 아내란 사람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니 슬픈 일이지."

지로가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예, 안타까운 일이에요."

"요즘 결혼한 여자들은 시가에 충성심 같은 걸 전혀 느끼지 않는 모양이야.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지. 남편의 뜻과는 상관 없이 자기 내키는대로 정당에 표를 던진다고. 현재 일본의 실상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야.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사람들이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거지."

지로는 한순간 고개를 들어 아버지에게 힐긋 눈길을 던졌다가 이내 다시 신문 쪽으로 돌리고는 말했다. "정말 맞는 말씀이에요. 하지만 미국인들이 가져온 게 다 나쁜 건 아니에요."

(중략)

"규율과 충성 같은 것들이 한때 일본을 하나로 묶어 주었지. 이런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의무감으로 단합되어 있었어. 한 집안에 대한, 윗사람에 대한, 조국에 대한 의무감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대신에 온통 민주주의란 말뿐이야.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싶을 때마다, 의무를 소홀히 하고 싶을 때마다 모두들 민주주의란 말을 동원하지."

"예 당연히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지로가 하품을 하며 한쪽 뺨을 긁었다. 85-6


"많은 여자들이 아이와 형편 없는 남편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고 비참한 삶을 이어 나가고 있어요. 뭔가를 할 용기를 못 내고 있다고요. 그들은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는 거예요." 니키가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넌 그런 이들이 자식을 내팽개쳐야 한다는 거냐, 니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엄마도 아시잖아요.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에요." 118


일본에서는 영국보다 식당이나 찻집, 상점 주인 모두가 어둠이 내리기를 훨씬 더 간절히 고대하는 것 같다. 해가 넘어가기 무섭게 창가에 전등을 켜고, 문 위의 간판에 불을 켜는 것이다. 그냘 저녁 우리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나가사키 거리는 이미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이 될 무렵 이나사를 떠나 하마야 백화점 식당가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그날이 끝나는 것이 아쉬워 전차 역을 향해 곧장 가지 않고 이면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기억하건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손잡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던 것 같다. 지로와 나는 한번도 그래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많은 젊은이들이 손을 잡고 저녁의 여흥을 찾아 걷는 것을 보았다. 하늘은 여름 저녁이면 종종 그렇듯 연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156-7


"옛날과 똑같아." 오가타 상이 말했다. 그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아이는 어른이 되지만 성격은 변하지 않지." 171



"저는 제 신념에 따라 그 글을 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가타 상 시대에 일본의 아이들은 끔찍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치명적인 거짓말을 주입식으로 배웠습니다. 가장 지독한 것은 그들이 보지 못하도록, 질문하지 못하도록 배웠다는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앙으로 빠져든 이유입니다." 

"우리가 전쟁에 졌을 순 있다." 오가타 상이 청년의 말허리를 잘랐다. "하지만 그게 적들의 방식을 원숭이처럼 따라할 이유는 되지 않아.우리가 전쟁에 진 것은 총과 탱크가 부족했기 때문이지 우리 민족이 어리석어서라든지, 우리 사회가 얄팍해서가 아니야. 넌 전혀 모른다, 시게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나나 엔도 박사 같은 사람이 말이다. 넌 글에서 그도 모욕했지.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조국을 생각했고 올바른 가치들이 보존되고 계승되도록 열심히 일했어." 

192


"처음으로 세탁기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생각 나네요. 그런걸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죠. 일할 수 잆는 두 손이 있는데, 그런 데에 그 많은 돈을 쓰다니요. 하지만 에츠코는 분명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