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지의 1/3쯤 차지하는 그 색들이 참 다양하다는것과 책 옆얼굴에 작게 끼워넣어진 저자 얼굴 사진, 그리고 책 표지 윗부분을 차지하는 그림(가끔은 저자 얼굴)이 세 조화가 책이 혼자 있어도 예쁘고, 심지어 책꽂이에 꽂아놔도 참 예뻐서 좋아했다. 심지어 들고다니기 좋은 무게와 판형까지 갖추고 있었으며 번역의 질도 괜찮았으니 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참 좋아한다.
나말고도 좋아한 사람이 참 많아서 민음사가 재미를 톡톡히 보았는지 (?) 모던 클래식이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내놓았다. 모던클래식 또한 책마다 부여되는 고유한 색깔, 표지에 삽입되는 그림, 책의 원제목 삽입 등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과 비슷하지만 제목을 표지 귀퉁이에 크게 집어넣거나 좀 더 높은 채도를 가지는 색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더 과감한 디자인을 적용한게 돋보인다. 이래저래 이유를 주렁주렁 써놨지만, 결론은 "예쁘다." 정말로.
도서관에서 눈에 띄어서 집어온 책이다. 작가는 스위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지만 이 책은 이탈리아문학이다. 이탈리아어로 쓰인 글은 프리모 레비의 것만 읽었던걸로 기억해서 이탈리아문학이 어떻다-라고 이야기 하기가 머뭇거려지지만, 이 책은 프랑스 문학과 독일 문학 사이에 있는 느낌이 자꾸 든다. 문체는 프랑스 문학같은데 책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독일인 같달까..그러나 책 속에 나오는 독일인 룸메이트는 거칠고 무디지만 항상 즐거운 식의 사람으로 묘사되어서 작가가 생각하는 독일인은 좀 더 다른걸까 싶기도 하다.
이 책에는 아름다운나날과 프롤레테르카 호, 이렇게 두 작품이 실려있다. 아름다운 나날은 스위스 산골의 수녀원 소속 여학교에서 살아가는 10대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서술자로 나오는 '나'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지만 아이를 여섯 살 때부터 맡겨버리다니 심한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사실 아이가 굳이 부모랑 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 살짝 건드리면 깨질 것 처럼 아름답고 날카로운 서술의 연속이다. 읽는 내내 기뻤다 좋은 작품을 만났구나 해서.
프롤레테르카 호는 아버지와 함께 열나흘 가량 배로 떠난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아버지는 열나흘 간의 시간을 허락 받고, 열여섯살쯤 된 딸과 여행을 떠난다. 그 배 안에 여자는 두 명이었고, 주인공으로 나오는 '나'는 선원들과 관계를 맺으며 지낸다. 아버지는 그 것을 눈치채고 못마땅해 하지만 강제로 막지는 않는다. 아버지와의 여행이 끝나고, 아버지는 얼마 후에 사망한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사실 친아버지가 아니었고, 소설 말미에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니콜라스와 했던 대로 하라고 말한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딸은 경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옷을 벗고 니콜라스와 했던 앨을 한다. 승무원의 거친 손이 그녀를 애무한다. 비늘을 벗긴다. 니콜라스처럼, 그도 과격하다. 그녀는 제비뽑기에 뽑힌 기분이다. 선원들의 제비뽑기에. 그녀는 불쾌감 속에서 쾌감을 찾는다. 난 싫어, 정말 싫어. 그녀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프롤레테르카 호는 경험의 공간이다. 항해가 끝날 무렵이면, 그녀는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여행이 끝나면 , 요하네스의 딸은 다시는, 다시는 안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은 경험하지 않으리라고. "나가." 그가 말한다. 그 남자도 그녀에게 옷을 집어던진다. "어서." 그가 웃는다. 그녀에게 문 쪽을 가리킨다." 180쪽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나의 사랑을 분명하게 말했다. 그녀에게라기보다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기차는 마치 장난감 같았다. 그리고 떠났다. "난 슬프지 않아." 그녀가 내게 쪽지를 남겼다. 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72쪽
나는 겨울과 호텔을 생각했다. 나뭇가지, 눈물이 뚝뚝 듣는 얼음을 생각했다. 봄이면 모두 녹으리라. 나는 그것들이 다 녹은 풍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드디어 프레데리크가 날 찾아왔다. 그녀가 앉았다.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 바라본다. 애인을 이어주는 점괘인가? 우리는 농담을 한다. (중략)
아듀, 프레데리크. 아듀라는 단어를 쓴 사람은 그녀다. 토이펜에서 내가 들었던, 그 짧은 단어의 필리스틴식 발음은 계속 반복되고, 뒤집어지고, 퍼지고, 물러나, 결국 죽은 자들의 언어 중 일부가 되었다.
20년 뒤, 그녀는 나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의 어머니는 여생을 보낼 수 있을 만한 유산을 그녀에게 남겨 주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우울증이 있어서 그런 식으로 계속 산다면 묘지로 갈 날이 빨리 올 것이었다. 106-7쪽
그녀는 아직 죽은자들에 함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너무나 강했다. 그것 역시 우리가 받은 교육 덕택이다. 아름다운 것들을 포기할 줄 아는 것, 그리고 좋은 소식을 두려워하는 것.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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