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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머리에 지진나는 소리

stri.destride 2022. 1. 10. 23:41

드라마든 유튜브콘텐츠든 거기에 나오는 엄마들은 보통 "우리 딸이 제일 예쁘다", "우리딸 사랑해", "우리 딸 뭐 먹고싶은거 해줄까" 같은 말을 하는데 내 엄마는 친구 말대로 엄마 자아보다 본인 자아가 더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3이라고 케어받을 생각 하지 말아라" 라거나 "밥 차려놨는데 데워먹기만 하면 되는걸 왜 못하냐" 라거나 같은 말을 했지. 독립 하기 직전에는 자꾸 내 살림살이를 본인이 자꾸 사오는 턱에 나도 이것저것 부딪쳐보면서 실패를 해보고 싶다고 그만좀 멋대로 사오라고 했더니 갑자기 또 화를 내서 부딪힌 적이 있다.

인간이 자신의 결핍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채우려고 하는게 가장 흔하고 깊은 비극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내 살림살이를 대신 사왔던건 자기가 시집갈 때 아무 것도 챙겨주지 않았던 외할머니에 대한 결핍을 나에게 풀기 위해서였다. 엄마도 아빠도 자신의 부모가 개차반이란걸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자기들 나름대로는 자식에게 엄청 잘 해준다고 생각한듯. 물질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부족함 없이 해주려고 했던 건 지금의 나도 잘 안다. 그런데 엄마아빠 입장에선 비극적이게도 나는 또 엄마아빠와 함께 한 유년 시절이 싫을 때가 더 많아서 항상 따로 사는 것을 꿈꿨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때렸는데, 체벌의 강도는 폭력이었다.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다니기도 하고, 젓가락으로 그릇을 부순 뒤에 젓가락을 던지기도 하고, 사전으로 두들겨 패기도 하고, 맨 몸에 수건을 휘둘러서 패기도 하고, 리모콘으로 후드려 패기도 하고. 별로 알고 싶진 않은데 조용히 패기만 하는거랑 욕설을 하면서 패기만 하는거랑 어떤 게 더 상처로 남을까? 둘 다 상처로 남을테니 별 소용은 없겠지. 어쨌든 부모가 노력은 한 것 같은데 그들의 한계도 자식이 감당해야 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열에 일곱번 정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부모가 정해준거니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따르라고 했고, 아빠는 성적에 집착하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자식을 이용할 때가 종종 있었다.

둘 다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따졌기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다. 사회적 통념을 순응하는 삶에도 돌이켜보면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덕분에 나도 비판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게 되긴 했는데..... 이게 마냥 부러운 일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나보고는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면서 본인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티비 보는 엄마랑 같이 살지 않아서 솔직히 편하다. 바닥에 물을 엎질러도 뭐라고 하지 않고 내가 닦아내면 되는 지금 삶이 편하다. 집에 들어왔을 때 앉아보라며 건방지게 굴면 너랑 말 안하겠다고 말하는 엄마랑 안 살아도 되서 좋다. 떨어져살게 되면서 그동안 억울했던 것들을 말했더니 너가 원망이 많아 보이는데 널 차단할테니 알아서 잘 살라고 하는 답장을 받았다. 솔직히 별로 슬프지 않다. 온통 모순된 말을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 하나 하지 않는데 보고싶으니 자주 오라고 말하는 엄마가 나는 보고싶지 않다. 조카도 별로 관심 없고, 그나마 말이 통하게 된 사람은 아빠인 것 같은데. 아빠는 나보고 영혼 없는 기술자가 되지 않게 조심하라느니 너네같은 알앤디 직군 임금이 올라서 집값이 올랐다며 일년에 한두번 해외여행 가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라고 해서 남의 속을 긁어놓는다. 예전에는 여자면 서울대 안가도 충분히 먹고 사니까 널 재수시키지 않은거라고 해서 어이털리게 만들더니.... 

근데 이제 나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을지도 모른다. 부모도 실수를 하고, 실언을 하고, 부모도 완벽하지 않고, 그냥 저런 사람이구나 하고 넘겨버려야 할 때라는 걸. 나도 이제 30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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