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불 조치에 대한 유감
화가 난 사람들이 책을 출판사에 반송하는 방식을 취하자 출판사에서 환불 조치를 시작했다. 교환도 해주는 모양이긴 한데 어쨌든 나는 현재의 방식이 모든 책임을 작가에게 지우는 것 같아서 유감스럽다. 잘못을 한 사람은 그냥 이렇게 잊혀지고 지워지는 방법밖에 없는가? 이번 사태로 인해 살아있는 사람의 서사를 마음대로 가져다가 특정이 가능한 만큼 사용하는 작법은 끝났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책을 만드는 데에 들어간 다른 사람들, 이 작품과 작가를 발굴하고 띄워준 사람들의 책임은 어디로 갔는지가 조금 석연찮아서 유감이다. 그리고 단순히 책을 환불/교환 하면 된다는 선례를 남긴듯해서 조금 마음이 안좋기도 함. 판매 중단을 해버리면 이 소설들이 왜 나쁜지를 자세히 쓰기가 어려우니...
2. 대중과 문단이 퀴어문학을 읽는 방식,
곧바로 김봉곤과 박상영의 책이 떠오를 수 있겠으나 사실 요새 문단은 동성애가 소재인 글들로 넘쳐나고 박솔뫼의 인터내셔널의 밤 같이 트랜스남성이 화자인 소설도 등장했다. 최은영, 김세희, 황정은, 김혜진 작가의 소설들은 레즈비언 서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각각의 소설들의 서사 또한 다양해서 독자로서 읽는 재미가 있었던 기억이 있다. 다만 유난히 박상영 김봉곤 작가의 경우가 독자와의 만남 관련한 이벤트들이 많았다고 느꼈는데, 아무래도 판매량 때문이긴 하겠지만 두 작가만 계속 인터뷰를 하고 주목받는 것 같아서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들이 더 궁금해지기도 했다. 사실 난 독자와의 만남 같은 출판사 행사에는 관심이 없어서 참여하진 않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건 작가의 의지도 분명 작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출판사가 남자작가만 조명해줬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가장 의구심을 가졌던건 퀴어소설을 대하는 대중과 문단의 태도였다. 소위 말하는 '알탕문학'의 시기를 지나 퀴어서사가 전면에 등장해도 독자의 환영을 받는 시기가 왔으나, 박과 김의 소설의 감상은 대부분 "청춘"이라는 단어로 표방되는 "미완성의 사랑"에 대한 찬미를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런 감상이 간과하는 지점은 왜 이들의 사랑이 자꾸만 미완성일수밖에 없는지, 이 미완성을 초래하는 사회적 개입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의 소설은 하도 회자되기도 하고 퀴어소설이라니까 나는 또 퀴어물이라면 최대한 접하려 하는 평소의 습관대로 헐레벌떡 달려가서 집어들긴 했는데, 작중 인물들이 대부분 자신에게 도취되어있으며 그로 인해 관계에 있어 무책임한 태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아 성실히 읽지 않았다. 또한 김의 소설에서 잦게 나타나는 성애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오히려 작품의 감상을 해치는 면이 다분했는데, 이것은 어쩌면 내가 크게 이입하지 못하는 게이 섹슈얼리티의 특성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넘겼지만 기존의 평론들이 게이 섹슈얼리티에 대해 짚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박과 김의 소설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은데, 대부분 그 둘의 소설을 묶어서 생각하고 사람들이 둘을 혼동하는 경우조차 많다고 했다. 사람들이 보통의 소설은 소설 내용 그 자체로 읽으려 하면서 유난히 퀴어소설들은 (영화도 그렇지만) 자꾸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다루었다는 사실에 집착하며 한 장르로 묶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퀴어 문학을 만약 그렇게 공통적으로 묶어 읽을 때 현대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욕망과 섹슈얼리티 실현이 어떤 난관에 부딪치는지, 왜 그런 난관들이 존재하는지, 그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와 같은 분석은 잘 나오지 않기 마련이다. 김과 박의 소설을 동일한 퀴어서사로 읽는 형태는 다양한 평론이 나오는 길을 방해한다. 대체적으로 "우리의 얘기다" "똑같은 사랑이다" 라는 식의 성급한 동일시만이 나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이제 단순히 동성애를 "똑같은 사랑"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고 그로 인한 문제점도 많다는 것을 느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들과 똑같은 사랑을 하며 그렇기에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말이 가려버리는 지점들이 분명 존재하고, 그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분명히 있다. (이를 반박하기에 제일 좋은 책은 아마 근래 나온 유성원의 외로움 없는 30대 모임이 있을 것이다. 유성원 작가가 이전에 행성인이 동인련이던 시절 웹진에 보냈던 게이섹스와 성병에 관한 글에 '나는 동성애에 편견 없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벙쪄하던 기억이 있다. 모든 게이가 유성원 작가처럼 살진 않겠지만 어쨌든 그 사람이 보여주는 일견 자기파괴적일 수 있는 일회성 섹스의 기록들 또한 버젓한 게이섹슈얼리티의 한 자리를 갖는다)
똑같은 사랑이기에 이성애자들도 납득할 수 있다는 명제는 이성애자들이 하는 사랑이 대부분 서로에 대한 배타적 헌신과 끝없는 애정이 가능하다는 사랑에 대한 신화를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나는 "똑같은 사랑"이라는 말이 일부 정치운동을 위한 상황에서 특수한 목적으로 기능할 수는 있겠으나 이 말이 한국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대전제로서 기능하지는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보다 다양한 형태의 애착/신뢰 형태와 그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 형성을 통해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이루는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서로를 무척 사랑하여 모든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만 몰두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몰두 없이도 우리는 기본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