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살문고 괜찮네. 들고다니기 좋아서 여백이 극악하리만치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읽었다.
박완서가 이렇게 날이 서있지만 매끄럽고 빠르게 읽히는 글을 쓰는 작가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더 많이 읽어둘 것을..
노파에게 미국이란 우선 먹을 것, 입을 것이 지천인 부자 나라도 되었지만, 서울 장안만 한 넓이의 고장도 되어서 딸하고 수틀리면 아들네로, 그 아들하고도 틀리면 다음 아들네로 몽당치마에 바람을 일으키며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잇는 것으로 되어잇다. 그러나 실상 노파의 자식들 중 미국에 있는건 딸뿐이고, 둘째아들은 서독에, 셋째아들은 브라질에, 넷째아들은 괌도에 가 있다. 8
언제나 남들처럼 나들이옷 차려입고 동물원이랑 화신상회랑 동양극장이랑 구경을 해 보나 생각하면 심란해지고 울컥 친정 생각까지 치밀어, 북으로 구파발 쪽을 바라보면 불과 삼십 리 밖이라는 친정이 하도 아득하 산 너머 또 산 너머라 그만 울음이 북받치던, 그게 바로 노파가 본 가장 넓은 세상이었으니, 지금도 이 세상의 크기를 그때의 그녀 시야만한 됫박으로 측량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9
소녀는 안다. 소녀는 여러번 보아서 알고 있다. 바로 저런 남남스러운 메마른 연민이야말로 비행기 표까지 끊어 놓고 나서 떠나는 날까지의 마지막 얼굴이라는 것을. 삼촌들도 그랬었고 고모도 그랬었다. 소녀는 지금 서독에 있는 큰삼촌, 괌에 가 있는 셋째삼촌, 미국에 가 있는 고모를 생각할 때마다 그들 개개인의 특징이 그녀 기억속에서 점점 흐려지는 반면, 그들이 어떻게든 외국으로 뜨기로 작정하고, 그 연줄을 찾고 수속을 밟느라 쏘다닐 당시의 그들 공통의 몸짓 - 흡사 덫에 걸린 들짐승의 몸부림이나 난파선의 쥐들의 불온한 반란이 저러려니 싶게 지랄스럽고 발악적인 몸짓만은 날이 갈수록 도리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1
소녀는 노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삼촌들의 편지에 관심이 있었다. 삼촌들이 소원대로 이 나라를 떠나 어느 만큼은 이 나라로부터 자유로워진 지금, 그들에게 그들의 조국인 이 나라는 어떤 뜻을 지니게 되었을까 소녀는 알고 싶었다. 그러나 소녀는 노파와 함께 번번이 허탕을 칠 수밖에 없었다.
어떤 편지에는 김치에 대한 거의 한장할 것 같은 허기증을 호소해 오는 수도 있었다. 소녀는 반갑고 좀 고소하다. 그러나 곧 씁쓸해진다. 장가라도 들면 여자가 김치쯤 담가주겠지. 아무튼 그것은 미각의 호소이지 정신의 호소는 아니잖는가? 거창하게 무슨 애국이니 애족이니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평범한 인간 정신과 조국과의 상관관계에 소녀는 조바심 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17
노파는 마지막 밤을 맏손주인 길남이와 자고 싶었다. 꼭 그러고 싶었다.
아직 어리고 하나밖에 없는 사내놈이라 오냐오냐해서 길러서 그런지 제 에미만 바치고 할미를 통 안 따르는 놈이었지만 하룻밤만 같이 자면 잘 사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놈을 꼭 껴안고 그 신통하고 대견한 귀물인 고추도 좀 주물러 보고, 잠결에 하는 발길질도 당하고, 이불도 덮어 주고 토실한 뺨에 뽀뽀도 해 주고 그리고 무엇보다 밤새도록 그놈을 품에 품고 있고 싶었다. 25
침실에 일요일 아침 시간이 늪처럼 고이고, 음습하고 권태로운 욕망이 수초처럼 흔르흐늘 흐느적대며 몸에 감긴다. 나는 남편에게 익숙하게 붙잡힌다. 나에게 그의 먼로가 돼 달라는 눈치다. 나는 그의 ㄴ먼로가 된 채 내가 짜낸 이태우 선생의 비명을, 신음을 생각한다.
"날 놔줘." "제발 날 살려 줘." 그건 어떤 소리 빛깔을 하고 있었을까. 지렁이 울음소리 같았을까 몰라. 그 신음을 육성으로 들어 두지 못한 건 참 분하다. 53
"나는 더 비참해지고 싶어. 그래서 고모나 할머니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기술이니 정직이니 근면이니 하는 거싱 결국엔 어떤 보상이 되어 돌아오나를 똑똑히 확인하고 싶어. 그리고 그걸 고모나 할머니에게 보여 주고 싶어."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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