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stri.destride 2016. 2. 8. 17:55



'병원에서 아기가 뒤바뀐다'는 선정적인 사건을 플롯에 넣으면 곽낵의 시선과 의식은 아마 '부부가 어느 아이를 선택할까?'라는 질문 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나 그족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힘이 너무 강하면, 그 이면에서 숨쉬게 마련인 그들의 '일상'이 소홀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끝까지 일상을 풍성하게, 생생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야기'보다 '인간'이 중요하다. 이번에도 이런 관점을 바꿀 생각은 없다. 7


멈춰 서서 발 밑을 파내려가기 전의 조금 더 사소하고, 조금 더 부드러운 것. 물 밑바닥에 조용히 침전된 것을 작품이라 부른다면, 아직 그 이전의, 물속을 천천히 유영하는 흙 알갱이와 같은 것. 이 에세이집은 그런 흙 알갱이의 모음이다.

아직 작은 알갱이 그 하나하나는 분명 몇 년이 지난 후, 다음, 그다음 영화의 싹이, 뿌리가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10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지금 세 살인 딸이 열 살이 되었을 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만들었습니다. 세계는 풍요롭고, 일상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우며, 생명 그 자체로 '기적'인 거야, 그렇게 딸에게 말을 걸듯 만들었습니다. 29


남자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행위가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자 유대인이 이런 말로 그 변명을 내친다.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살마은 몰라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죄가 무겁다." 그 장면을 최근 계속해서 떠올린다. 38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원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59-60


"세상에는 쓸데없는 것도 필요한 거야. 모두 의미 있는 것만 있다고 쳐봐. 숨막혀서 못 살아." 68


상대의 대사를 들을 수 있는 힘이야말로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임이 분명하다. 말하는 힘이란 우선 이런 듣는 힘이 있어야 생긴다고, 고키 군을 보며 확신했다. 139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결함은 문제 삼지 않고, 상대를 이해력 없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이런 품위 없는 태도가 부시의 본질이라면, 설사 부시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쪽은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진정한 의미의 '반부시'가 아닐까. 160


도시 문명의 밖에는 도시보다도 넓은 초원이 그야말로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 그것이 세계다. 거기에는 '세간'과는 다른 가치관이 있고, 내부적으로 그 땅에 닿은 바람을 맞음으로써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상대화 할 수 있게 된다. 시야가 좁고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일수록 내부에서밖에 통용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같은 단어를 중얼거리는 법이다. 167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문화로 성숙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치와 언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