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물들, 강정 외, 한겨레출판사

stri.destride 2014. 9. 24. 13:09



시인의 사물들

저자
강정, 고운기, 권혁웅, 김경주, 김남극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14-06-1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쉰두 명의 시인이 새롭게 빚어낸 쉰두 개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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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씨 글 읽으려고 도서관에 신청해서 빌려봤다. 가장 좋았던 글은 두 개의 글이었다. 반절 가량의 글은 책장을 바라보고 입으로 바람을 훅 하고 불면 글자들이 터럭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버릴 것만 같아 끝까지 읽지 못했다. 


시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인'만''의 사물들에 대한 산문들이다. 새로운 시인을 알게 되었다. 그의 시집을 주문하였다. 기쁘다. 산문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되리라 생각했건만, 다시금 집어든 것이 산문집이라니. 그래도 산문집을 읽다 보면 내가 요근래 읽고 싶은 글이 어떤 글인지 선명하게 드러나는 점이 좋다. 요새 나는, 너그러워 지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다. 



가로등 - 박형준 (부분)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가로등'이라는 말을 참 아름답고 쓸쓸하게 표현한 것 같다. 그는 죽어서 가로등이 되고 싶다고 했다. 죽어서 가로등이 되어 너의 어두운 문 앞에 서서 납빛 저녁을 환하게 비추고 싶다고 했다. 18 


예나 지금이나 시인은 배고파 보여야 아우라가 있고 밥술이나 뜨고 살 수가 있다. 그런 편견이 꼭 나쁘다고 할 것도 없다. 그나마 그런 편견이 있으니 아직은 시인으로 살 만한 것이다. 19 


산소통 - 성동혁 (부분)


내 몸을 열고 그 안을 만진 신의 손이, 그 손이 지나간 자국들이 보인다. 그것이 어릴 적엔 불현듯 콤플렉스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그 자국은 내가 신을 믿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단서가 되었다. 나의 몸이 신의 온기를 담는 커다란 그릇이 된 것임을 난 믿는다. 24-5


하루하루 보이지 않는 것들이 깊이깊이 들어온다. 그럴 때 나는 눈을 감고 기도를 하거나 예배당에 앉아 오랫동안 찬송가를 듣는다. 풍경이 더 풍성해지도록 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눈망울이 사랑을 담는 가장 아름다운 그릇이었으면 한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란 말을 두 눈 가득 꾹꾹 담아 보여 주던 나의 아름다운 사람들처럼. 

가을이다. 아직 단풍나무가 푸른 가을. 이제 저 파란 나무들이 가을을 담을 차례이다. 지상이 가을을 담는 커다란 그릇이 될 것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유병록 51


재떨이 - 고운기 (부분)

오고 싶은 학교였지만 오고 싶어서만 온 것이 아니었다. 집 생각에 걱정스러운 시간이 있었다. 공부를 한다고 무조건 성과가 나는 것 아니니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럴 때면, 담배 한 대의 뜨거운 기운이 나의 속을 달래는 동안 무심히 지켜봐준 재떨이였다. 걱정과 두려움으로 재가 된 세월을 받아준 재떨이였다. 91


정해종 - 카메라 (부분)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것은 마음의 눈을 위해서이다'라고 말한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다. '일상 속에는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결정적 순간이 어디에나 있다. 이 세상에 결정적 순간이 아닌 순간은 없다'라고도 덧붙였다. 감긴 한쪽 눈이 마음의 눈을 연다. 그리고 그 눈을 통해 삶을 발견하고 변화시키는 순간을 포착한다.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고 그 비이ㅢ를 드러내는 결정적 순간, 바로 창조자가 되는 순간이다. 지겹도록 변화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세계는 카메라 앞에서 무력해진다. 144



함민복 - 시계 (부분)

도처에 시계 아닌 것이 없다. 물은 흐르는 시계고 꽃은 피어나는 시계고 사람은 늙어가는 시계고 철새는 날아가는 시계고 바람은 불어가는 시계다. 생명들도 생명 아닌 것들도 다 무엇인가의 시계이며 거대한 우주라는 시계의 부품이다. 


둥근 시계가 시간이라는 관념의 바퀴를 돌리며 시계를 움직이고 있다. 

219-220 


김언 - 담배 (부분)

요컨대 담배 연기는 내 글의 토대와 꼭대기를 동시에 점령하고 있다. 담배가 없었으면 결코 쓰지 못했을 글. 담배가 없었으면 피어오르지도 못했을 생각. 담배가 없었으면 저 막막한 글쓰기의 공중을 또 무엇으로 덮으면서 건너올 수 있었을까. 담배 때문에 두렵고 담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겁을 집어먹던 그 사내는 어느 순간 담배 때문에 글쟁이가 되고 담배 때문에 또 시인이 되어버렸다. 공포에 몸서리치면서도 그것을 끊지 못하는 것. 오히려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를 만들어가는 것. 그걸 중독이라고 불러도 별로 저항할 생각이 없는 그는 지금도 담배 때문에 겨우 힘을 얻는다. 담배 덕분에 간신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236


생업에 쫓기면서 맨 먼저 달아나는 것은 생각이다. 잠깐의 딴생각도 아주 깊은 시간이 동원되는 사색도 모두 달아나기만 바쁘다. 생각이란 걸 잊어버린 자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자연히 공포 때문에 키워온 글쓰기도, 시 쓰기도 저 멀리서 손짓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들려주지를 않는다.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