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동부, 임미리

stri.destride 2014. 6. 26. 02:48



경기동부

저자
임미리 지음
출판사
이매진 | 2014-03-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광주대단지 키드의 눈높이 민주주의를 해부하다! 철거민 분리수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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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세력은 당연히 지우고 싶었겠지만 저항 세력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유는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적의식성을 갖고 조직화되지 않은 '사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의식적 운동을 통해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 회의와 반성이 일면서 비로소 사건은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8




광주대단지의 철거민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때도 그랬고, 그 뒤로도 말할 수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때 '대신해 말한 자'는 아무것도 못 가진 철거민들보다는 이미 가진게 있는 사람들을 대변했다.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대신 말해야 할 자'들은 사건이 사회운동의 동력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9



공포스러운 소문은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에서 나온 것이면서 동시에 '불안'을 가중하는 구실을 했다. '아기를 삶아먹은 산모' 이야기는 사실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그만큼 대단지 주민들은 공포를 전유했다. 공포를 낳게 한 부정적인 사회 조건들을 전유하면서 공포와, 공포의 또 다른 이면인 사회를 향한 불만을 전유했다. 이렇듯 빈곤에서 온 강제 이주와 고립, 고립이 낳은 빈곤의 악화, 여기서 발전한 불안과 공포는 터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28



한편 그때 농촌지역이던 분당구에 1990년 이후 분당과 판교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또 다른 차별과 배제가 생겨났다. 이번에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온 것이었다. 분당 사람들은 자신들을 성남 시민이 아니라 분당 시민으로 불렀고, "우리 애들을 어떻게 같은 학교에 보내느냐"(박봉준)고 항의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아파트 입주 직후인 1992년부터 분당을 성남시에서 분리하자는 주민운동이 벌어졌다. 40년 전 대단지 주민들에게 가해지던 차별과 배제가 2013년 지금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강화됐다. 53




처음에 고향으로 돌아온 학생들이 차별과 배제의 기억 때문에 하나로 묶였다면, 그 뒤에는 신념이 그 학생들을 더욱 굳게 결속시키고 세력을 키울 수 있게 했다. 학생들 대부분은 주체사상을 이념으로 해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꿈꾸는 민족해방 계열이었고, NL은 민중민주 계열에 견줘 집단기억에 귀속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NL은 민족을 최상의 가치로 삼아 민족과 반민족 세력 사이에 전선을 긋는다. 이렇게 그어진 반제통일전선에서 NL은 과거 민족이 겪은 고통과 저항의 역사를 현재의 기억으로 불러내 '저항 행동의 틀'을 만든다. 다시 말해 NL은 '민족의 기억'에서 출발한 사회 변혁의 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단기억을 활용하는데에서 PD세력보다 유리한 해석의 틀과 조직 문화를 가졌다. 이렇게 민족의 기억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학생들은 광주대단지에서 출발한 차별과 배제의 기억을 자양분삼아 자기들을 스스로 단련하고 강화해갔다. 64




청년회뿐만 아니라 성남의 운동 단체들은 광주대단지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성장했다. 특히 터사랑청년회와 성남청년회는 동아리 활동으로 역사 교실이나 지역 탐방을 일상적으로 펼치며 광주대단지의 기억을 공유했다. 1991년 8 10사건 20주년때는 광주대단지 시절을 경험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자료집을 내기도 했다. 광주대단지의 기억은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공유되면서 기억의 두 주체, 곧 '원초적 사건의 직접적 희생자 집단과 원초적 사건이 발생한 계기와 의의에 동의하고 이것을 계승하는 데 목적을 둔 집단"이 완성돼갔다. 78



경기동부연합은 국가가 붙인 이름을 거부하고 자기가 선택한 이름을 부여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에는 난동과 폭동의 딱지를 떼고 '혁명의 전통'이라는 훈장을 붙였고, 국가보안법이 규정한 '적국'에는 '동포'의 이름을,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에는 자주민주통일운동의 표찰을 붙였다. 승리한 지배자의 역사가 아니라 패배한 피해자의 기억을 선택한 것이다. 삶에서 동떨어진 역사 대신 집단의 직접적 경험에 연계된 구체적인 기억을 집단기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민족과 지역 공동체의 집단기억을 운동역량으로 동원한 경기동부연합은 1990년대 중반부터 강고한 결속력으로 자기들만의 전설을 만들었다. 이때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2000년대 새로운 사회운동의 물결에서도 서민 생활에 밀착된 운동 방식과 특유의 헌신성으로 지역 기반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경기동부연합은 활동 무대와 영역을 지역에서 중앙으로, 사회운동에서 정당활동으로 점차 넓혀가기 시작했다. 90




패권주의적 행태는 어느 정파나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에 관한 인식의 차이보다 힘의 우위가 더 중요했다. 힘이 센 곳은 힘으로 밀어붙였고 힘이 약한 곳은 연대나 편법으로 세력을 키웠다. 2002년 말 다함께는 규약에 있는 '약간 명의 부위원장'이라는 문구를 악용해 위원장을 제외하고 부위원장에 자기 세력 10명을 출마시켰다가 소수파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105




경기동부연합에게 '나머지 전부'인 적의 정체성은 약자, 피해자다. 그리고 적의 권력을 상징하는 기표는 국보법과 대의 민주주의다. 수십년 간 자신들을 억압해온 국보법은 적의 무기이자 적 그 자체였다. 종북주의 청산을 외치며 민노당을 탈당했다가 다시 돌아온 새진보연대도 한때 적의 무기를 휘둘렀고, 국보법의 억압에 무심하던 참여계는 국보법의 방관자였다. 비례대표 사태에 와서 국보법 말고도 또 다른 권력의 기표가 더해졌다. 대의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전국운영위원회와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포장된 대의 민주주의는 내부의 적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무기이자 적들이 가진 권력의 기포였다. 국보법과 대의 민주주의의 기표는 한때는 종북으로, 또 한때는 부정선거의 이름으로 경기동부연합을 억압했다. 148




한편 부역자 처리의 가혹함과 방대함, 거기에 연결돼 있는 연좌제는 극우 반공 체제를 형성, 지탱,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집단 학살이 40년 가까이 계속된 공포와 피해 의식, 무지와 왜곡의 체계화 속에서 극우 반공 체제를 형성, 강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집단 학살의 기억은 해소되지 않고 고착된 채로 남아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212





진영 논리는 밖으로 적대성을 강화하고 안으로 이견을 봉합한다. 적대성은 진영 논리의 존재 기반이다. 빨갱이로 몰고 종북으로 몰아 사람들의 적대감과 증오를 조장하고 확산하려는 상대편이 있을 때 빨갱이와 종북으로 몰린 세력 역시 상대편을 향한 적대감을 키워 내부의 단결을 꾀하게 된다. 증오가 증오를 키우는 것이다. E. P. 톰슨이 적대성과 공격성의 자기 증식 체제라 한 '절멸주의'는 바로 진영 논리 자체가 상대방을 향해 적대성을 끊임없이 강화시켜 나가면서 결국 양쪽 다 절멸로 치닫게 하는 것을 말한다. 

적대성이 커질수록 내부의 단결은 가옺된다. 단결이 강조될수록 내부의 이견은 단결을 해치는 요소로 간주되면서 봉합돼버린다. 사고와 운동은 정지된 채 사람들은 깃발의 노예가 된다. 죽지않고 살아 남기 위해 부정한 권력을 대체하려고 전선으로 모인 사람들이 깃발의 노예가 되면서 진영은 그것 자체가 억압으로 바뀌어간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 탄생하고 운동이 정지하게 되는 순간이다.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