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작가가 어른들의 대화 사이에서 들었던 아이의 죽음을 토대로 작성한 소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단단하게 써내려간 소설. 칠년 전 쯤 내가 닥치는대로 읽어치우던 한강의 소설들 같으면서도 소설들 같지 않은 느낌. 요근래 나온 책들 중에는 제일 아름답고 제일 슬펐다. 하지만 이런 작품을 읽고 나서 마냥 좋았다고, 세상의 티 하나 안 묻힌 표정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쾌락의 자양분으로 삼는 몰지각한 행위가 아닐까 싶어서, 너무 너무 좋았다 - 라고만은 말을 할 수는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는 여전히 지금, 현재형인 사건들을 어떤 이들은 과거로 치부하려고만 하고, 어떤 이들은 없던 일인것처럼 소각해버리고 있어서, 잊지 않으려는 노력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
그 온화한 성품만큼이나 외할머니의 임종은 조용한 것이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 나갔다. 23
캄캄한 이 덤불숲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내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엇던 그 밤의 모든 것. 늦은 밤 창문으로 불어들어오던 습기찬 바람, 그게 벗은 발등에 부드럽게 닿던 감촉. 잠든 누나로부터 희미하게 날아오르는 로션과 파스 냄새. 삐르르 삐르르, 숨죽여 울던 마당의 풀벌레들. 우리 방 앞으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커다란 접시꽃들. 네 부엌머리 방 맞은 편 블록담을 타고 오르는 흐드러진 들장미들의 기척. 누나가 두번 쓰다듬어준 내 얼굴. 누나가 사랑한 내 눈 감은 얼굴. 55
끄떡끄떡 허공에서 흔들리던 벗은 발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 모습을 본 순간 너는 소스라쳤는데. 세차게 눈꺼풀이 깜빡이고 속눈썹이 떨렸는데. 그떄 난 네 손을 붙잡았는데. 우리 군대가 총을 쐇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너를 힘껏 끌고 나아가며 난 노래했는데. 목이 터져라고 애국가를 따라 불렀는데. 59
어디로 갈까, 나는 자신에게 물었어.
누나한테 가자.
하지만 누나가 어디 있을까.
난 침착하고 싶었어. 탑 아래 쪽에 쌓인 내 몸이 완전히 다 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어.
나를 죽인 그들에게 가자.
하지만 그들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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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녀는 스물 네 살이고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스럽기를 기대했다. 사과처럼 볼이 붉기를, 반짝이는 삶의 기쁨이 예쁘장한 볼우물에 고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빨리 늙기를 원했다. 빌어먹을 생명이 너무 길게 이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85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병에 네가 꽃은 양초 불꽃들이. 102-3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116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걸 알고 있습니다. 134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 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ㄴ디ㅏ.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있따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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