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레닌은 꽤나 잘 살았나보?
위대한 지도자가 자기의 전 생애를 걸고 얼마나 혁명을 위해 몸바쳐왔는지를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내용에 푹 젖어 있던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정신이 확 드는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레닌의 생활수준은, 지금 즉 혁명 후의 러시아나 체코의 일반 시민보다 훨씬 높았고 가구 같은 생활 용품도 모두가 품이 있고 비싸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이 체험은 나로서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실제 눈에 보이는 것도, 머리속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전혀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29
하지만 좀 과장된 혁명적 표현을 즐기는 결점만 빼면, 아냐는 참으로 정서가 안정된 착하고 심성이 바른 아이였다. 심술궂은 데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고 말도 재미있게 했다.아무튼 아냐랑 같이 있으면 지루한 줄 몰라, 반 아이들은 아냐를 따돌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88
아냐에게 친근감을 느낀 것은 이런 대화를 통해서였던 것 같다. 서로 동떨어진 다르 나라, 다른 지역에 살았던 부모님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공산주의 사상에 이념을 불태우고, 자기 생명조차 내놓고 파란에 찬 나날을 보냈다는 사실이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보이게 했다. 92
공산주의라는 것은, 인간의 법적/사회적 평등 뿐 아니라 경제적인 평등을 실현하려는 이념이잖아.사회주의는 그런 공산주의로 가는 이행단계고. 그러니까 빈부의 차를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노력하는거 아냐? 94
샹젤리제 거리 끝에는 '인민궁전'이라고 이름지어진 덩그러니 큰 건물이 서있었다. 파노라마 기능이 있는 카메라로 찍는다 해도 자우가 다 들어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이 건조물은 차우셰스쿠가 살던 집이란다. 이곳 대연회홀에서 매일처럼 연회가 열리면 그 조명때문에 부쿠레슈티 시의 절반이 정전되어버렸단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이 인민궁전이라니, 어딘지 소녀시절 아냐의 언어센스를 닮은듯해 피식 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니에요. 아버지가 꿈꾸신 공산주의와 당신이 실천한 가짜 공산주의를 같이 두지 마세요! 법적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모순을 느껴, 당신이 가진 혜택을 모조리 내던지신 분이에요! 당신이 저항한 것은 그 반대였잖아요!' 하고 마음속에서는 외치고 있었지만 아흔 노인을 상대로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142
마음 좁은 나는 나도 모르게 꼬집고 말았다.
"루마니아 특권층에 속하는 것보다 영국의 중상류에 머무는 편이 더 좋아?" 162
"서구로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 이것만큼은 러시아가 뛰어났다고 절실하게 느낀 게 있어요. 그건 재능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죠. 서구에선 재능이 자기 개인에 속하는 것이지만, 러시아에선 모든 이의 재산이랍니다. 그러니 이곳에선 재능 있는 자를 시기해서 어떻게 하면 끌어내릴까 안들이죠. 러시아에선 재능 있는 자는 무조건 사랑받고 모두가 받쳐주는데..." 180
일본에서는 너무나 간단히 아무렇지도 않게 동유럽이라고 부르지만, 폴란드인도 체코인도 헝가리인도 루마니아인도, 이렇게 포괄되는 것을 무지하게 싫어하여 '중유럽'이라 정정해준다. 국제 회의에서는 이 표현 하나만 가지고도 번번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221
"그런데 마리,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어느 순간에 파괴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고 있단다.번역을 하는 순간에도, 부엌에 서 있을때도, 갑자기 이런 것으로 머리가 꽉 차버려. 일단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털어도 털어지지 않는 소름끼치는 이미지가 솟구쳐 올라, 미쳐버릴 것만 같아."
"..."
"이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맞아, 5년 동안 난 가구 하나도 더 사지 못했어. 아니, 요만한 식기 컵 하나도 살 수가 없었어. 가게에서 좋은 게 눈에 띄어 하나 사보자 싶어도, 깨진 다음 맛볼 슬픔이 늘어날 뿐이지 하는 마음이 금방 들어, 사고 싶은 마음이 흩어져 버려. 그보다 내일이라도 혹시나 우리 가족이 몰살당하면 어쩌나 하고..."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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