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최현숙, 이매진

stri.destride 2014. 7. 7. 01:08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저자
최현숙 지음
출판사
이매진 | 2013-11-08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우리, 웃는 여자들은 다 이쁘다! 일제 강점기 평양에서 출발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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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열 다섯 여성들의 구술사를 담은 책이 다섯 권으로 나올 예정이고 그 첫 번째가 이 책이다. 최현숙씨는 오며 가며 본 사람들 중 하나다. 나는 그이가 나온 영화도 보았고, 그이에 대한 인터뷰(미래에서 온 편지)도 읽어보았는데 책이 나왔다길래 사놓고는 여느때처럼 안읽고 있다가, 아는 사람이 요 근래 읽은 책 중에 제일 좋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펴 읽었다. 

그이는 아마 나보다 더 꼼꼼하고 단단하게 좋은 대목을 붙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로서는...너무나도 질곡이 많은 이야기들을 날것으로 듣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책의 세 번째 구술은 나의 가족들의 삶과 비슷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여자가 자식 키우기 위해 해먹을 게 뭐가 있어? 안 굶자고 하는 거면, 도둑질만 빼놓으면 다 괜찮은 거야. 청상과부니,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살라 그래. 난 그렇게는 안 살아.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 아들도 나 미군들하고 살림 산 거 왠만큼 알아. (..) 저 목사를 무슨 돈으로 만든건데? 그 미군 부대 근처서 번 돈으로 집을 사놨기에, 지 학비를 댄 건데. 77


'구술자는 누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의 문제, 자신을 향한 긍정과 타인(사회 또는 청자)의 시선 사이에서 갈등하고 협상하는 과정,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과 하는 구술사 작업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며 정체성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해나가는 과정, 그리고 사회적 낙인과 싸워나가는 소수자의 전략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구술 작업 이후 본인 내면에 이 부분이 어떻게 정리되는지는 별도의 문제로 여겨진다. 정체성은 존재라기보다는 되기, 끊임없는 재구성의 과정이다. 121



"그놈이 그렇게 하는데도 좋더냐? 이년아, 나 산거 못 봤냐? 하필 쫓아 해도 이 모진 팔자를 쫓아 하냐? 그놈 씨 안 죽일려면, 에미랑 동생들이랑 한구덩이에 다 모타놓고, 한꺼번에 싹 죽어버리자." 엄마가 그렇게 모진 욕을 하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199


'평화로움'과 '여유'라는 첫 느낌을 믿어서도 아니고, 가난과 고난의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궁금해서만도 아니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지는가'라는 내 질문에 관해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싶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지는가'는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질문이다. 진보 정치를 합네 하며 '계급'과 '차별'을 강령에 넣고 온갖 회견문과 피켓과 말로 선언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그런 사람들과 만나지지도 않았다. 아마 진보정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많이 해야 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와 느낌과 욕망을 상세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집단은 전형적일 수 있어도, 개인은 누구도 전형적이지 않다. 235


나도 의논은 하고 싶었어. 근데 아버지는 의논하자는 게 아니었잖아.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고, 다른 의견을 말하면 화부터 내고, 더 이야기하면 손부터 올라오고 때리는 거잖아. 그런 사랑은 싫었어. 그건 사랑도 아니고 소유고, 장악이지. 자식은, 특히 딸은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그 생각을, 나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어.

아버지와의 그 부딪침이 나한테는 사회의 모든 관습과 부딪치는 계기이자 과정이었던 거 같아. 난들 그게 쉽고 편하기만 했겠수? 나도 너무 힘들었고, 죄책감과 미안함 때문에 스스로 나쁜 년이라고 자책도 많이 했지만, 그렇게 죽일 년 노르승ㄹ 하지 않을 수 없었어. 난 그렇게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의 딸로는 도저히 못살겠는 거지. 내가 내 삶을 선택하고 싶은데, 아버지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내게 강요한다고 나는 생각했거든. 난 그러고는 못사는 사람이잖아. 아버지와의 단절 이후 내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내 길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징표였어. 342


그때는 어려서 나 하나 구해내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 아버지의 집을 나오면서 나 자신을 얼마나 욕했는지 몰라. 나쁜 년이라고, 죽일 년이라고. 부모를 배반한 년, 천륜을 끊은 년, 이기적인 년, 저만 아는 년, 독살스런 년. 그 모든 욕을 나한테 다 하고 나서야 나를 구해낼 수 있었어. 그 욕을 나한테 수도 없이 해댔지만, 엄마,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정당했어. 세상 사람 모두 나를 향해 돌을 던져도, 내 안에서 나는 정당했어. 그러느라고 너무 힘들고, 너무 많이 울었어. 그렇지만 엄마, 그러고야 나를 찾은 거야.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며 살지를, 그제야 알겠는 거였어. 엄마, 늘 부족하고 틀리지만, 나는 좋은 사람 이더라고..... 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