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글자들. 단어들은 화려하게 살아 숨쉬고 이야기의 흐름은 읽는 사람을 차분하게 몰입하도록 만든다. 읽기 힘들어서 천천히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 꼼꼼히 읽느라 천천히 읽었다. 피로 물든 방이 제일 재밌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성관계를 한번도 맺지 않았음'이 그 주인공들 스스로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힘을 부여한다는 점이 아예 대놓고 나와있는게 신기하다. '페미니즘으로 동화 다시 읽기'라고 시중에 나왔던 이야기들 중에선 가장 수작인듯 싶다. 어릴때 읽은 동화들은 좀 별로였으니 (..)
성관계를 한번도 맺지 않았고 그 점으로 인해 자신이 현재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소녀들이 그녀들의 욕망을 스스로 실현하는 모습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처음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금기들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고 금기 속으로 뛰어드는 소녀들의 모습. 사랑을 갈구하다 기괴하게 말라비틀어져버린 야수들.
밤은 내 피부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 투과성 물질 같았다. 51
그러나 좀 더 민주화된 이 시대에 내 남편은 살롱에서 사냥하려고 멀리 파리까지 가야 한다. 55
그 바다는 조만간 모든 것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오래된 뼈를 하얗게 문지르고 모든 얼룩을 씻어낼 것이다. 63
"당신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어요." "그에게는 그것이 당신을 처벌할 충분한 이유가 되겠지요." 63
마치 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페라를 열두 번 보았는데 열세번째는 트리스탄이 살아나 마지막 장면에서 관에서 뛰쳐나와 베르디의 유쾌한 아리아를 끼워넣어 이렇게 노래하는 것을 보는 듯 했다. 즉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쏟아진 우유를 두고 울어봤자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되며 자신으로 밀할 것 같으면 앞으로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 작정이라고. 입을 떡 벌리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침내 무능해진 그 꼭두각시 조종자는 인형들이 줄을 끊고 튀어나가 태초부터 자신이 지정해준 의례절차를 버리고 스스로 살아가려 하는 것을 보았다. 기가 막힌 왕은 자신의 인질들이 반항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66-7
그가 절반은 꿈꾸고 절반은 깨어 있는 상태로 누워 있을 때, 나는 그의 부스럭거리는 머리카락을 크게 두 움큼 뽑아서, 그가 깨지 않도록 아주 부드럽게 그 머리카락을 꼬아 줄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빗방울처럼 부드러운 손으로 그 밧줄을 써서 그의 목을 조를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모든 새장을 열고 모든 새들을 풀어줄 것이다. 그들은 어린 소녀들로 다시 변할 것이고, 모두 목에 그가 애정의 표시로 물어서 생긴 붉은 상처 자국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토끼 가죽을 벗길 때 사용하는 칼로 그의 멋진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낼 것이고, 그의 회갈색 머리카락 다섯 가닥으로 낡은 바이올린 줄을 맬 것이다.
그러면 손이 닿지 않아도 불협화음의 음악이 울려 나올 것이다. 새로운 줄 위로 활이 저절로 춤을 추면 현들은 이렇게 외칠 것이다. "엄마, 엄마, 엄마가 나를 죽였어요!"169
소녀는 그의 욕망이 낳은 아이였고 백작부인은 그애가 미웠다. 174
밤과 숲이 그 머리카락에 엉킨 어둠과 함께 부엌으로 들어왔다. 225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 고립된 곳의 혼미한 상태에서 소녀는 자기가 이름도 못 붙이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물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털 난 들짐승의 생각을 하고, 변화하는 인상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원시적인 지각력을 가진 이 영원한 이방인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느꼇는지, 그녀가 꿈들 사이의 간격을, 잠잘 때만큼이나 이상한 잠 깰 때의 깊은 간격을 어떻게 뛰어넘었는지 말로는 묘사할 수 없다. 늑대들이 그녀를 돌본 것은 그녀가 불완전한 늑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불완전함을 두려워하여 짐승처럼 혼자 살게 했다. 우리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래전 주로 농민계층 여성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던 민담이 권력을 가진 남성에 의해 출판된 텍스트로 변한 것인데, 이 과정에서 이야기에 담긴 가치관, 특히 성역할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었다. 253 역자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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