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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를 중심으로 인용한....서평...?

stri.destride 2020. 5. 31. 19:14

[들어가며]

트위터의 트랜스젠더 혐오 현상이 생각보다 무척 오래간다. 이 플로우의 대부분이 10-20대라는걸 생각해보면 앞으로 근 100년은 혐오담론이 대세일 것인가 싶어 조금 암담하다. "OO로맨틱 XX섹슈얼"과 같이 로맨틱과 섹슈얼을 분리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명하거나 스스로를 논바이너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며 나는 젠더의 구분법이 논바이너리 스펙트럼으로써 꽤나 연속적이고 다차원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이제 널리 퍼졌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앞날을 비교적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트랜스젠더(특히 MTF집단)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게시물이 맹렬한 기세로 늘어났다. 사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워낙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집단에 대한 (막연함을 포함한) 혐오는 만연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인권운동이나 여타 다양한 운동들이 필요한 거라고 너무 낙담하지 말자고는 생각했다.

 

다만 지금의 트랜스젠더 혐오의 양상은 이전의 트랜스젠더 혐오가 동성애자/동성간 섹스에 대한 혐오와 묶여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뭉뚱그려져 있었다면, 현재는 이와 비교해 제법 차이가 크며 이를 짚어두고자 이 글을 쓴다. 현재의 트랜스젠더 혐오의 발화 주체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적극적으로 칭한다. 이들의 주장은 진짜 여성만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으며, 트랜스젠더 여성은 거짓 여성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이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페미니즘을 오독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서 나온 내용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서술하고자 한다.

 

[여성을 위한 국가는 없기에 여성-되기를 거부하는 주체들]

나는 이들이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적극적 혐오 발화의 근거를 페미니즘에 두고 있는 이유를 짚어 보기 위해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이 일어난 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다. 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뒤로 <82년생 김지영> 소설의 열풍, 탁현민의 청와대 비서관 발탁, 불법촬영 및 지인 능욕 영상 유포와 편파수사 관련 시위, 서지현 검사의 발화로 시작되어 연극계, 문학계로 이어져 학내 성폭력을 고발하게 된 한국판 미투 운동, 정준영 최종훈 등의 성폭행 및 불법촬영, 최근의 텔레그램 발 온라인 성착취 까지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이를 통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연인 관계에 있는 사람마저 여성의 몸을 착취하고 그것으로 돈을 벌거나 남성 집단에서 모종의 명성을 얻는다는 사실이 지속적으로 보도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여성' '안전'에 대한 담론이 주된 주제가 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수많은 보도가 계속되었고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이에 대한 글을 쓰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여성에 대한 착취에 분노했다. 그러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폭력과 범죄를 공모하고 가담한 사람들은 이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권김현영의 말 대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자유,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될 자유,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다. (실제로 일부 집단은 아직까지도 불법촬영이 왜 범죄가 되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그런 움직임에 분노한 '여성'들이 자체적으로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여성에게 주어지는 외모에 대한 성별 규범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탈코' 담론이 부상했다. 나는 어쨌든 옷차림, 화장, 얼굴 표정 등을 점점 자세하게 지시하는 방식으로 여자를 괴롭히(231p)’는 것이며, 이를 통해 신체를 실제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페미니스트는 여자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웃어주지 않는 것부터 페미니스트로서 실천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왔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스마일 보이콧을 주장했고, 사라 아메드는 흥을 깨는 페미니스트 킬조이에 대해 언급했다. (236p).’ 그렇기에 나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탈코'를 실천했을 때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범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를 통해 신체를 감각할 수 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여겨 탈코 담론은 나름의 순기능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배제의 정치학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여성의 안전'에 대한 담론이 예상하고 싶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탈코를 하지 않은 여성들이 잘못하는 것이라며 그들을 나무라는 일들이 늘어났고, 계속해서 그들이 제시하는 규범들은 늘어나고 그것들을 하나라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부장제의 부역자라는 라벨이 붙었다.[1] 다양한 몸들에 대한 상상을 통한 가능성의 탐색, 다양한 몸의 필요성에 대한 담론은 점점 흐릿해 져가고 한 가지 형태의 몸이 이상적인 몸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몸은 아이러니하게도 힘이 세 보이는몸이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인건지 극단적으로 식이를 제한하여 마른 몸이 되는 사람을 동경하는, '프로아나'라는 집단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어떤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하고 그렇게 되기 위한 규범들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데에 있으며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만족스럽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가혹한 말들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상적인 모습은 정상으로 표현되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숭고한 서사를 만든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여성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반지성주의와 결합한 형태의 뺄셈의 정치학을 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안전 담론에 매몰됨으로써 페미니즘 정치학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과, 현재의 여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 결과적으로 가부장적인 통제 기획에 포섭됨으로써 가부장제의 의미망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먼저, 안전 담론이 부각되면서 여성만 있는 공간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만 입장 가능한' 장소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들이 '여성'을 입증하는 수단은 신분증 검사, 손목 검사, 목소리 검사 등 성별 이분법에 기반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탈코 규범의 수행을 통해 가부장제의 기획-성별 규범을 수행함으로써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는-을 거부한 상태에서, 다시 이러한 여성적 신체의 특징으로 여성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회귀함으로써 이들의 입장에는 모순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근력운동을 많이 해서 굵어진 손목은 '여성'의 손목으로 판단되는가? 신분증 위의 '여성'을 나타내는 숫자는 그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는 성별 규범과 평행선에 놓여있지 않은가? 이는 결국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남성을 보편으로 인식하면서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여성을 정의하려는 관행(89p)’이 기본 전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여성-되지 않기남성-되기로 환원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 이들의 방법이 가부장제가 기획한 구도를 그대로 따르게 되어 결과적으로 가부장제의 논리망 안에 갇혀버렸음을 의미한다.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전제를 해석하지 못해 벌어진 혼란은 결국 배제의 기법과 만난다. 이 배제의 기법은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해버리는 행위, 입장을 낙후시키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 존재를 제거해버리는 행위를 말한다. 여성/국민의 안전을 담보하지 않는 국가의 운영 방식은 삶에 대한 짙은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데 이를 희석시키기 위하여 놀랍게도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고 모욕하는 방식이 채택된다. 문제의 원인은 남성중심 사회를 지탱하는 가부장제의 권력구조에 있는데, 엉뚱하게 트랜스젠더 특히 MTF집단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공격의 근간이 반지성주의에 기반한 거짓 정보들을 이용하여 공포를 조장하는 점에서 이 트랜스젠더 혐오자들의 공격은 무척이나 악질적이고, 공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이며 실질적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러한 방법은 결국 그들이 이야기하는 여성 안전의 실현을 실패로 귀결시키는데,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고 모욕을 주는 행위가 주가 되어버림으로써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성 억압의 원인인 가부장제를 종식시키고자하는 페미니즘의 목적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는 비극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기반이 되는 공포의 정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반지성주의와 만난 가짜 뉴스에서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입장이 거짓이라는 비판을 받으면 '손이 떨린다' '잠이 오지 않는다'며 공포에 매몰된 모습을 보임으로써 상대와의 토론을 거부해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가 얼마나 위협적인 상황에 놓였는지 만을 반복해서 진술하며 '너는 억압받고 있지 않기에 우리의 현실을 모른다'고 함으로써 대화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버리는데, 이는 토론 가능한 상태가 되길 원하지 않는 (68p)’ 것이다.

 

결국 이렇게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고 '안전'한 공간으로 도피해 버리는 행위는 결국 고립을 자처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이들의 대응 방식은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을 갖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의 운동 방식은 또다시 모순과 실패로 회귀하고 만다. '힘센 여성이 되겠다'던 포부도 온데간데없고, 공포에 질린 피해자의 모습만이 존재한다. 현재의 트랜스젠더 혐오 집단이 주로 제시하는 사례는 '트랜스젠더를 인정(??)하게 되면 여탕에 트랜스여성이 자지를 덜렁거리면서 들어오며 이것이 매우 공포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 디스포리아를 겪는 트랜스여성이 뭐하러 자신의 페니스를 여성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말은 결국 '페니스를 흔드는 남성은 공포스럽다'는 남성권력의 여성 통제 방식이 제시하는 논리를 그대로 순응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성주의자들이 원하는 세상은 남성의 페니스가 공포스럽지 않으며, 페니스를 통해 여성을 얼어붙지 않는 세상이 아닌가? 이러한 '공포에 질린 모습'은 남성 권력이 원하는 '말하지 못하는 여성'의 존재로 회귀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의 이들의 논리는 결국 다시 모순에 사로잡힌다.

 

[다시 을 의심하고 두려움 없이 질문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해서 누군가를 배제하고, 남성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얼어붙는 것이 아니다. 여성을 억압하는 폭력이 사실은 가부장제의 기획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이 기획을 이용하는 집단에게 그들의 방식이 더이상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억압된 집단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은 '차이 속에서 함께 세력화 되어야만 우리 앞에 놓인 난제를 공통의 문제로 인식하고 손볼 수 있는 가능성이 (류은숙, 인권운동 2)' 때문이기도 하다. 안전 담론에 매몰됨으로써 현재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해결책이 기존의 남성성을 재현하는 주체되기로 이어지는 것은 결과적으로 가부장적인 통제 기획에 포섭되는 것이므로 여성주의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가부장제의 기획에 포섭되지 않고 페미니즘은 지금까지 보편으로 간주되어온 지식의 권위를 묻고 또 물으며 권력의 작동 과정을 심문하고, 그 자신이 권력이 되는 것을 경계(62p)’함으로써 '체제의 모순을 터드려서 스스로 해방되는' 길을 찾아 나갈 수 있다는 점이 내가 여성주의 인식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로 결심한 큰 이유들 중 하나였다.

 

안다는 것이 맥락이라는 조건에 종속시키는 것을 알고, ‘분석의 매 순간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지식이 무엇이며, 이것을 지식으로 만드는 권력이 어떻게 실행되는지 알고자 하는 용기는 페미니즘 지식에서 필수적이다. (63p)’ 가부장제가 짜 놓은 구도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이 권력이 되려는 운동은 페미니즘의 방식이라고 볼 수 없다. 설령 지난한 과정이라 하더라도 끝없이 질문하는 힘, 자신의 미숙함을 인정하는 용기, 타인의 실수를 수용하는 너그러움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고 믿는다.

 


[1] 그러나 애초에 이 단어를 사용하려면 가부장제 자체가 불법이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하다. (8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