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 유디트 헤르만
민음사 모던클래식이라 .......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으로 꽤 재미를 봤나보다
알리스가 미햐와 함께한 단 한 번의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이 끝났을 때 두 사람은 합의하에 헤어졌다. 이제 완전히 끝이야. 미햐가 말했다. 그리고 알리스도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만족해 왔고, 싸우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 그만둘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햐가 먼저 집으로 떠났고, 알리스는 2~3일 더 머물렀다. 그런데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올랐다. 기차역에서 미햐를 배웅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울 수밖에 없었던 기억. 미햐가 죽기라도 한 것 처럼...... 그때 알리스는 생각했다. 이제 다 끝났어. p36
그 문 뒤에는 히말라야 삼나무들이, 그리고 그 뒤로는 산이 있었다. 나무다리 위에 있는 안나가 아주 작게 보였다. 푸른 비키니 차림의 안나는 커다란 수건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샛노란 선 로션 병, 그 좌우로 펼쳐진 황량한 흰 자갈밭.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안나에게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까?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에게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 알리스는 생각했다.
p64
생수는 플라스틱 병에 들어 있었다. 푸른색 코팅 병. 생수.
봉투는요?
네 주세요.
주인은 오렌지색 봉투를 금전 출납기 위로 밀어 놓고, 거스름돈을 현금 접시 위에 소리나게 떨어뜨리고는 플라스틱 바리케이트 뒤로 돌아갔다. 가게 주인은 그 앞에 서있는 동안에도 인상착의를 설명할 수 없을정도로 모습이 평범했다. 부러진 손톱. 올이 풀려 밑단이 너덜거리는 스웨터. 가게 안에는 화분에 담는 흙과 젖은 종이 냄새가 났다. 좋은 하루 되세요. 알리스는 그렇게 인사했다. 그저 뭐라고 대답ㅎ자는지 들어 보기 위해서였다. 가게 주인은 손님도요, 라고 대답했다. 억양이 전혀 없는 목소리였다. 알리스는 문을 열고 생수병 두 개와 담배가 든 봉투를 가슴에 안은 채 도로를 내려가 왼쪽으로 갔다.
p89
말테 삼촌의 편지들이 들어 있는 봉지를 손에 단단히 들고 알리스는 역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편지들을 지금 읽어야 할까, 나중에 읽어야 할까, 아니면 읽지 말아야 할까? 언제나 그 안에 확고하게 들어있는 것. 그것은 그 무엇도 바꾸어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식별하기 어려운 불변의 핵심을 중심으로 하나의 원을 덧붙이는 것은 가능하다. 알리스는 그 편지들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나는 그 여러개의 원 중에 하나야. 알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겨울답게 스산하고 춥지만 한편 화려하게 꾸며진 역 안의 모든 사람들과 이곳 또는 저곳으로 갈 수 있는 여정의 온갖 가능성 사이로 사라져갔다. p133
잘 읽히지 않아서 천천히 읽었다. 딱 딱 하고 끊어지는 문장들, 파편들로 이루어진 문장들. 얇은 책이라서 금방 읽힐 줄 알고 빌렸더니만 도저히 읽히지가 않아서 아니이게 독일문학의 특징인가..이러면서 절망하기도 하고. 차라리 문장이 이렇게 짧다면 원본으로 읽어보면 (..)? 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건 아닌거같고..
알리스라는 여자가 자기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다섯명의 남자를 떠나보내면서 겪는 일들을 짧게 짧게 적어놓은 글인데, 단편소설집이라기보다는 연작소설집의 느낌이 강했다. 사실 나는 거의 장편소설로 생각하고 읽어서 모든 이야기가 다 연관성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애쓰면서 읽어서 더 힘겹게 읽었을수도 있다. 그래도 이렇게 삶의 일정 혹은 일부 순간들을 강렬하게 기억하려 애쓰고 포착하려고 애쓰는 화자의 시선이 좋았다. 관찰자 시점이지만, 알리스와 그 사람들의 관계를 설명해주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여운이 남는걸지도 모른다. 뭐 굳이 인물과 인물과의 관계, 감정선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소설을 특히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잘 읽은걸수도 있겠고. 이전 작들과는 꽤 많이 달라졌다는데, 이전작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