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유주, 연대기
stri.destride
2021. 5. 14. 15:24
학생때처럼 좀 덜 쫓기는 기분이 들 때 읽었으면 좋아했을지도...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자살하고 싶어서였다. 어떤 죽음에도 이유가 없듯 자살에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거나 기술의 발전으로 생각을 읽어낼 수 있게 되더라도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자살하고 싶다, 자살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릇처럼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폭력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 당한 폭력보다도 더 큰 폭력을 스스로 행사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복수의 방식이었다. 31-2
나는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책을 펼치고는 했어, 책에서는 늘 첫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쓰지 않은 문장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책들이 펼쳐졌지, 그렇게 많은 책들이 펼쳐졌다. 펼치다, 펼쳐지다. 펼쳤다, 펼쳐졌다. 그리고 나는 늘 첫 문장을 발견했어, 수없이 많은 첫 문장들이 마지막 문장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것은 아니었다. 내가 쓴 문장들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내가 쓰고 싶은 문장들도 있었어, 그런 걸 보면, 그런 걸 읽으면 훔치고 싶었다. 하지만 훔치지 않았지, 훔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어느 날에는 개가 나타났지, 바람이 불었고, 달도 떴다. 이야기를 쓰려다가 지우고 지우려다 썼다. 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