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 서늘한여름밤

stri.destride 2020. 6. 3. 15:12

대화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려 이 악물고 노력했다. 사랑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내가 자꾸자꾸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사랑은 그렇게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다만 그게 나의 모습은 아니었을 뿐. 5

나는 상식적인 선에서 행동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보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행동하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다, 내 감정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고, 나이가 들었으니 내 나이답게 행동하는게 상식적인 것이고, 작은 일로 크게 상처받는 것은 비상식적인 것이다. 27

사람의 마음 안에는 작은 갈고리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흔들거리는 이 갈고리가 비슷하게 튀어나온 누군가의 갈고리와 만나 훅 걸리는 순간, 우리는 그 상대와 무언가로 특별한 게 있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너와 무언가로 이렇게 걸리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좋았다. 너와 나 사이에만 통하는 무언가, 어떤 느낌을 갖고 싶었다. 비슷한 결핍이 있다거나서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취향, 유머 코드, 비밀 같은 것. 그런 것들이 우리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재료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달랐다. 40

나는 이 공간에서 집안의 갈등을 중재하는 맏이가 아니었고, 믿음직스러운 장녀도 아니었다. 나는 더이상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집에는 '그럴거면 내 집에서 나가'라고 화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없었는 집에서 나는 혼자 소파에 누워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편안함을 느끼고서야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이렇게 편했던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너와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어떤 역할도 아닌 스물 여덟살의 나를 처음으로 만났다. 

독립은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게 아니었다. 그건 스케치북의 새로운 페이지를 마주하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내 앞에 있던 스케치북은 엄마아빠가 그린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하는지. 그러나 독립하고서 알게 되었다. 빼곡히 채워진 그림을 당연하게 받앋르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 페이지를 뜯어 버리고 새로운 페이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백지에 무엇이든 그릴 수 있었고, 어떤 것도 그리지 않아도 되었다. 59

처음부터 그냥 톡 까놓고 "야 이새끼야 연인이라면 날 더 사랑해주고 내가 의지할 수 있게 해달란 말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부담을 줄까 봐, 그러면 나를 싫어할까 봐, 한번 의존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까 봐, 겆러당하면 너무 상처받을까 봐. 그리고 아마도 내가 알기로 '세계장녀협회'의 규정에 따르면, 장녀들은 이런 말을 하는 게 금지되어 있을 것이다. 86

나는 결혼하고 어디로 갔어야 하는 걸까? 나의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는 나를 이기적이라고 욕하면서, 그럴 거면 왜 결혼을 했느냐며 빈정거린다. 그러나 나는 며느리나 아내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관계를 통해 더 진실한 내가 되고 싶어서 결혼했다. 결혼이라는 길에 가부장제라는 똥이 널려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그 똥을 더러워서 피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똥을 피하기 위해 내가 가고 싶은 길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더럽고 짜증 나더라도 너와 함께 이 똥을 치우면서 갈 것이다. 133

가족 구성원이 기분이 나쁜 걸 보면 풀어줘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지 않으면 나에게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누군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욕설이 터지고, 물건이 깨질 것이다. 어린 날의 불안감은 오늘의 분노로 번진다. 내 노력에도 기분을 풀지 않는 너는 그 분노에 불을 댕긴다. 157

나는 그 선배처럼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어서,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207

나와 비슷한 구멍을 숨기고 노력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모습처럼 보이는 사람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울렁였다. 당신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다고 귓속말하고 싶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나에게도 물어봐주면 좋겠다. 싶었다. 210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스스로에 댛나 부적절감 때문에 내가 아닌 어떤 모습이 되느라 노력하며 살아온 시간을 털어놓고 이해받고 싶었다. 사실 나도 너무 멀쩡해 보이지만, 아무도 필요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당신도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210

만족 시킬 수 없는 부모와 살다 보면 어릴 때는 애를 쓰다, 사춘기 때에는 좌절하다, 커서는 분노하게 된다. 내게 멋대로 기대했다 멋대로 실망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게 된다. 228

별 볼일 없는 자신들이 나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얼마나 인정받고 싶은 존재였는지 몰랐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나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잘못된 행동을 지속할 이유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걸 안다. 지나간 시간의 상처는 내 탓이 아니었더라도, 앞으로 만들어갈 시간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