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stri.destride 2020. 2. 14. 16:10

 

작가가 섬세하게 축조해놓은 다양한 세계들은 마치 여러 가지의 스노우볼 컬렉션을 보는 것 같아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소설간의 호불호 편차가 나에게는 좀 있었다. 나는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영웅 처럼 직접적인 사람들간의 관계와 갈등 혹은 의문에 다가서는 소설들이 특히 좋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강과 황정은과 같은 작가를 너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내밀하게 고백할수밖에 없다... SF는 직업상 읽으면서 피로도가 매우 크다. 

 

후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도 한숨을 쉬고 싶었다. 어쩐지 힙스터들을 대상으로 한 대사기극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지만, 어차피 몇 달 지나면 다들 흥미를 잃을 수많은 유행 아이템 중 하나일 뿐이다. 194-5

정확히는, 내 옆자리에서 세상이 무너진 듯 엉엉 울며 손수건으로 코를 닦던 한 중년 여성을 떠올렸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영화에 대한 메모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내 옆에서 한참이나 훌쩍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이런 억지 신파 영화에 그렇게 감동을 했을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녀가 가방에서 영화 포스터를 꺼낸 다음 신경질적으로 구겨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 여자에게 영화의 내용은 중요했을까? 그 순간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215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가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ㅇ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는 허공중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래. 네 말대로 이것들은 그냥 플라시보이거나, 집단 환각일거야. 나도 알아." 
(..)
" 하지만 고통의 이밪들은 산산이 흩어져 내 폐 속ㅇ로 들어오겠지. 이 환각이 끝나면." 217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흔히 애증이 얽힌 사이로 표현된다. 딸ㅇ르 사랑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삶을 재현하기를 거부하는 딸. 착한 아이 컴플렉스를 앓는 딸과 딸에 대한 애정을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하는 엄마. 여성으로 사는 삶을 공유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다른 세대를 살아야 하는 모녀 사이에는 다른 관계에는 없는 묘한 감정이 있다. 239

그녀는 왜 딸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착 외에는 가질 수 없었을까. 무엇이 엄마를 그렇게 몰아갔을까. 그럼으로써 세상에 단 하나의 유이미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게 된 이 상황은 불가피한 겅이었을까. 254

항공우주국은 재경 이모의 마지막 선택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당시 항공우주국은 캡슐 폭파 사고의 여파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주비행사 중 한명이 미션을 수행하지 않고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사실까지 공표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으리라고 판단한 것일수도 있다. 실제로 캡슐이 발사되는 장면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던 그 순간부터 사고 소식이 들려오던 최후의 순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행사가 세 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297

재경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사람들은 재경을 닮은 다른 약한 사람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래서 결함이 있는 존재를 중요한 자리에 올리면 안 된다고, 표준인간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비난들은 분명히 재경의 잘못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 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