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20주년 기록책. 좋은 구절이 너무 많아서... 적을 게 많았다.
어떤 매뉴얼도 없었다. 마치 누에가 스스로 실을 토해서 집으르 짓듯이 교사들은 오직 자신들의 경험과 욕구에 의지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이 많은 것들을 기획하느라 얼마나 고심하고 고심하고 또 고심했을까. 돈도 없고 경험도 많지 않았던 젊은이들이 머리를 맞대어 문제를 해결하고, 주머니를 털고 발품을 팔아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35
작은 첫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이것이 모래 위에 디딘 것인지 반석 위에 디딘 것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애써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흔적도 없이 바람에 날려 사라질지 모른다. 기억해야 한다. 조금씩 눌러 주지 않으면 또다시 잊혀져 버릴 흔적. 기억하자. 우링겐 세상 모든 길을 갈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다. 60
생활을 함께한다는 것은 단순히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향한 비판적 의식과 저항의 가치까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생활공간을 조직적으로 건설한다는 것은 이곳을 통해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기초를 만들어 갈 전망을 가지는 것이다. 62
권리는 법전에 있지 않았다. '배운'사람들이 먼저 찾아서 하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권리는 차별 받고 억압 받는 사람들이 그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당연한' 저상버스와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그 증거다. 76
모두가 차별없는 세상을 원한다고 말하므로 일견 모두가 그 뜻을 공유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각자가 받아들이는 해방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교사와 학생,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떠나 인간은 모두 서로 다른 경험과 처지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함께 무언가를 도모한다면 크고 작은 충돌은 필연적이다. 이 과정 없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갈등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갈등과 충돌 위에 제대로 설 수 있어야 비로소 자기만의 언어로 해방의 의미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쉽게 견디지 못한다. 상대방에게 실망하거나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이 괴롭기 때문이다. 80
운동에는 근육이 필요했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 진지를 추구하고 법을 끌어오기 위해 싸우는 구성원들의 공간. 85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우리는 먼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우리를 외면하고 있는 이 정부가 알아들을 때까지 더 큰 목소리를 냅시다! 그것도 안 되면 손짓, 발짓, 몸짓으로라도 그동안 억누르고 참았던 설움과 분노를 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쏟아 부읍시다! 2006년 우리에게 봄은 없고 검게 그을린 얼굴가 매서운 찬바람만 있다고 할지라도 싸웁시다!! 세상을 바꿉시다! 그 세상에서 우리도 당당하게 살아 봅시다! 99
모든 빼앗긴 자들이 그녀처럼 울지 않는다. 모든 차별 받은 사람들이 그녀처럼 싸우지 못한다. 매일매일 자신과의 약속을 되새기면서 하루하루를 새롭게 조직하는 인간만이 그녀처럼 살 수 있다. 울분을 터뜨리는 것은 한두 번이면 족하다. 계ㅔ속해서 울음을 울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 자신의 증언으로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빼앗긴 자, 피해자가 아니라 당당한 주체로서 말이다. 102
한국 사회 어디에도 답은 없었다. 중증 장애인과는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지 않는 것'만이 이 사회의 정통한 매뉴얼이었다. 노들은 자신이 가장 잘 쓰는 방법으로 그 답을 찾거나 쟁취해 나갔다. 그 방법은 바로 이야기하는 것, 배우는 것, 그리고 싸우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오랜 시간을 겹겹이 쌓고도 무수히 실패하는 일일지라도. 160
맹수란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충동들, 정서들을 지칭하는 것인데요. 그때 학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거나 손을 휘저었스빈다. 그 맹수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듯 말이죠. '내 안의 맹수들'에 대해서 이토록 크게 반응하는 사람들, 그 맹수들의 존재를 이토록 절각ㅁ하는 사람들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불수레반 학인들이 느끼는 우울, 분노, 격정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정글에서 살아온 맹수들 같가도 했습니다.
이 맹수들이란 장애인들이 입은 상처이자 또한 장애인들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습관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마음의 짐을 더는 수단으로 다짐을 이용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 고백과 다짐을 받아줄 착한 장애인은 없습니다. 169
'함께 놀기'란 '함께 투쟁하기'보다 어렵다. 모든 놀이기구의 출구를 빠짐없이 기프트샵으로 연결시켜놓은 영악하 자본이 산도 깍고 강도 덮는 능력을 가지고도 기어이 휠체어 하나 들어갈 통로를 열어 놓지 않았ㄷ.
어쩌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실패를 시인하는 것, 그 조건 위에서는 결코 함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일지 모른다. 우리는 함께 노는 것에 실패했고 함께 사는 것에도 실패했다. 오직 그렇게 고백할 때만이 함께 진실하다. 우리가 나누어 가진 분열의 추억만이 진실하다. 사랑과 봉사의 환상이 깨어지고 진정한 연대가 시작되는 곳은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진실을 대면할 때이다.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다.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