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사사키 아타루

stri.destride 2019. 12. 10. 13:17

세계는 눈부셨다. 만물의 윤곽은 명징했다. 어둑어둑하게 흐린 하늘도, 잔뜩 찌푸린 날씨도 그리고 느긋하게 거니는 밤도, 이 명징함을 잃어버리게 하기에는 부족했다. 어떤 어둠도 완전한 어둠은 될 수 없고, 도처의 투명하고 무수한 것들을 또렷이 투영시킬 만큼 끊임없이 빛이 새어나왔다. 빛은 편재했다. 깊고 깊은 빛의 바다 밑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세계는 한없이 아름다웠으며 또 잔혹했다. 능히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현기증이 날 만큼의 투시력이며 눈이 멀 만큼 밝은 시력이여서 얼이 빠지게 하고 정신을 잃게 한다. 붉은 녹빛의 태양은 그대로 붉게 물들여서 눈을 속이고 현혹시킨다. 생각하는 족족 시각에 빼앗긴다. 어쩔 수가 없다. 인간 세상의 한복판에서 너무나 명징하고 가깝게 그 세상을 내다보는 까닭에 꼼짝없이 세상과 동떨어지고 만다. 17

그러는 사이에 오로지 시인만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밤이, 놀랍게도 부드러운 향기와 은빛을 번쩍이며 조용히 다가왔다. 매우 아름답지요. 법과 질서가 운산무소, 즉 흔적도 없이 산산이 흩어진 뒤 아름다운 밤이 오는 것입니다. 41

곰곰이 생각하면 우리는 유럽 철학자가 했던, 서구의 말에만 존재한느 비유를 이용하여 잇속을 챙기는 이야기에 수ㅟㅂ게 걸려 드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근대에 절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로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만큼 근대에, 즉 유럽에 침식당했는지, 어디까지 침식당하지 않았는지를 모릅니다. 49

'아랍의 민주화', '이집트의 민주화'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표현인지 아시겠죠. 서구의 언론 매체[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극히 고압적으로 '우리와 비슷해졌다'라고 말할 따름입니다. 논외입니다. 그런 수법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77

'그 시절이 좋았지'하는 말은 실은 오만한 언사에요. 자신이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는지에 관한 두려움이 없어요. '그 시절'에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을 잊었고, 바로 그 시절에 지금의 비참한 상황이 싹텄을지도 모릅니다. 109 

모두 이런 세계를 싫어하면서도 바꿀 방도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전혀 근거 없는 믿음입니다.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그럼 다음은 모두의 당입니까.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해먹는 하찮은 게임입니다. 나치가 등장하기 전에도 그런 게임은 존재해왔습니다. 놀이판 자체를 뒤집어엎을 시점이 왔건만 어째서 고작 장기판의 말이 움직인 정도로 기뻐합니까. 우리가 놀이판 자체를 뒤집어 엎을수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한다면 인간이 아닙니다. 가축입니다. 
왜라고 계속 물읍시다. 계속해서 질문합시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