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사람의 십년, 펑지차이 지음, 박현숙 옮김, 후마니타스

stri.destride 2016. 10. 13. 10:54

허구는 소설에 많이 사용되고 비허구는 구술 방식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 허구는 고도의 포괄성과 전형, 개성적인 형상, 작가의 비범한 상상력과 창조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비허구는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하며, 그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인식과 날카로운 발견 및 포착, 그리고 이를 문학작품으로 채집하고 구성해 내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8


이 시대가 만들어 낸 거대한 비극을 내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29

학교 안에서 돌아다니는 각종 구호의 영향으로 내 사상이 혼란스러워져도 일단 그를 만나면 이내 평온해졌고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나는 우리가 순수한 마음과 당에 대한 충성심만 갖는다면 그 어떤 큰 폭풍이 불어온다 해도 절대 배가 뒤집히지 않으리라 생각했지요. 38


잔인한 게 뭐냐고요? 문혁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잔인하다는 건 온갖 방법을 다 생각해내서 풍부한 창의력으로 사람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힘으로만 때리는 것이 아니랍니다. 95


그리고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아버지를 해친 걸까요, 구한 걸까요? 처음에는 아버지를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결국 아버지를 해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일은 모두 이해되는데, 그 일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어떤 때는 이런 것 같다가 또 어떤 때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죄가 없고, 모두 사인방이 저지른 일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 했단 말입니까? 121


나는 어땠냐고요? 거대한 폭풍 속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다치게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평온합니다. 과거에 좋은 일을 조금 했고, 조국과 인민에게 떳떳하며,, 지금도 내 원칙을 끝까지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맡은 직분을 다 하고 있고요. 비록 문혁 때 받은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마음 밑바닥에 적당히 묻어둘 수 있습니다. 국가가 내게 어떤 분부를 내리든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국가가 부르기만 한다면 말이죠. 140


내 젊음을 증오했어요. 하루하루가 우울하고 답답했는데 살아야 할 날은 너무 길고 희망도 없었어요. 그런데 사인방이 잡히고 문혁이 끝났어요. 아빠 회사에서 문혁 문제를 정리할 때 나에 관한 자료가 발견되었고 그제야 내 누명이 벗겨졌어요. 하지만 당시 나는 열아홉살밖에 되지 않았고 직업이 없어 월급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목수된 가산과 주택 분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정치는 정신적 상처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아요. 153


어느 날 명예 회복 후 돌려받은 옛날 물건을 뒤적이다가 문혁 전에 내가 썼던 글씨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깜짝 놀랐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았거든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요. 어찌되었든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다지 상심하지는 않았어요. 상심이란, 운명을 도와 자신을 해치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지금 내 모습대로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지도, 나 자신을 해치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253


그러나 법은 죄인을 처벌할 수 있을 뿐, 고통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