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 존 에버라드 지음, 책과함께

stri.destride 2015. 7. 7. 18:07



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

저자
존 에버라드 지음
출판사
책과함께 | 2014-08-14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특별한 평양 주민이었던 영국 외교관,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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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댁 방문은 시련이었다. 손주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그 옷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도시를 가로지르고, 때로는 선물을 사고, 언제나 똑같은 주제로 몇 시간 동안 앉아서 따분한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애들은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니? 건강은 어떠니? 나는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부모와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는 남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북한 친구들 중에는 그런 경우가 일절 없었다. 36


나는 동성애 행위의 증거를 마주친 적이 없지만, 이것이 북한에 동성애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동성애 금지에 관한 북한의 법을 모르긴 하지만 그 법이 동성애를 가혹하게 처벌할 것이고, 북한 사람이 외국인 대사와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할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한다. 47


시대의 징후인 양 한 젊은이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녀는 술집을 개업할 생각이었다. 53


2006년 어느 날, 평양 노점에서 과자를 사려고 줄을 서 있ㅁ는데 내 앞에 있는 여자가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그녀가 무슨 과자를 사고 싶은지 설명하는동안(언어장애가 심했다) 노점 주인은 짜증내는 기색 없이 차분히 기다렸다가 과자를 내주었다. 나는 그가 돈 받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 후 이 사건은 나에게 수수께끼로 남았는데, 김정일이 평양의 번듯한 외양만 보여주려고 장애인의 수도 거주를 금지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날 뇌성마비 장애인이 정중히 대우받는것을 보고 기쁘기 그지없었다. 92


부자들을 쳐다보는 서민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신일 것이다), 그들이 부유한 여자들의 사치스러운 핸드백과 값비싼 신발을 보고 자신의 초라함 차림을 비교했을 때, 과연 사회주의적 낙원의 약속을 믿었을지 나는 의문이다. 101


엘리트 비핵심층인 지인들 대다수는 정권이 무너지면 대중이 들고일어나 자신들을 가로등에 목매달것이라며 걱정했다. 인민들의 분노는 언제나 근심거리였다.지인들은 자기네가 특권층이고 그 특권이 분노를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엇다. 북부의 어느 도시에 갔다가 돌아온 친구는 자신의 세련된 억양을 듣자마자 그곳 사람들이 자신을 노려보았고, 들으라는 듯 버르장머리 없는 평양 애새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133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할 때의 분위기는 금강산이나 개성공단을 방문할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금강산과 개성공단에서 북한은 분명 부유한 이웃나라와 합의에 도달해야 하는 가난한 나라이지만, 공동경비구역에서 조선인민군은 남한과 수십 년간 대치하는 상황을 편안하게 여긴다. 여기서 한반도의 정치는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그때 그대로 동결되어 있다. 180


북한 사람들을 마치 어린애처럼 대하는 많은 NGO들의 태도 역시 한탄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어느 구호계획 현장을 방문했다가 NGO의 고참 활동가들이 성큼성큼 돌아다니며 제국주의 시대 백인 마님들의 전통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마냥 북한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208-9


평양의 많은 대사관들은 할 일이 전혀 없었다. 이 대사관들은 그저 양국 관계의 상징으로서, 외국 대사관의 존재를 국제적 존중의 표지로 여기는 북한 정권을 기쁘게 하기 위해 평양에 있었다. 이들 대사관의 외교관들은 이따금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것 말고는 해야 할 업무가 없었다. 어느 외교관 동료는 남포 가는 길에 있는 훌륭한 골프장에서 일주일에 몇리을 보내고 드물게 손님을 맞을 때만 출근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다른 외교관은 북한의 훌륭한 예술품들을 수집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 다른 외교관은 평양 생활이 유급휴가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애석하게도 평양의 유럽연합 대사관들은 이런 여가생활을 즐기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두고 보기 어려운 북한당국의 일부 활동을 만류하고,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기술해 정부에 보고하기 위해 장시간 근무했다. 220



스위스 개발협력청은 1년에 한 번 자기네 수영장을 청소하는 일을 파티로 바꾸어놓았다. 수영장에 와서 벽과 바닥을 박박 문지르고 나서 모두 바비큐와 맥주를 즐겼다. 230



모스크바의 공식 노선이 민족주의가 아닌 계급 투쟁에 토대를 둔 세계 혁명이었음에도 '우리 민족끼리'같은 표현이 일찍이 북한의 선전에 흔히 쓰였다. 여기에 더해 김일성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강한 민족주의적 색깔을 드러냈다. 적군이 조만식보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덜하다는 이유로 발탁한 김일성이 세계에서 가장 민족주의적인 국가 가운데 하나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역설적인 결과다. 257